나무의 푸름을
나무의 푸름을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5.26 00:00
  • 호수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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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림
칼럼위원
녹음방초 승화시 (綠陰芳草 勝花時), 푸른 잎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낫다는 계절이다. 산도 들도 온통 푸른 잎이 무성하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때 문득 한산시(寒山詩) 의 다음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어인 이일까?


"저 물가의 나무보다 못한 신세여  나무는 한해 한 번씩 푸르건만."


나무는 한해 한 번은 변함없이 푸르러지지만 고달픈 백성은 그러지를 못하다는 것이다. 한해 한 번도 푸르러지지 못하는 삶이라면 버려진 삶이다. 이 땅에는 아직도 버려진 삶을 사는 국민들이 너무 많다. 푸른 청춘을 구가하고 2만 달러의 풍요를 한껏 누리는 한편에서는 미처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 가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극빈자들이다.

노숙자, 무의탁 노인들 문제 말고도 최저생계비 이하 가정에서 생활하는 아동 비율이 8년 만에 2.5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학대를 당하는 아동의 수도 4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단다. 사회적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수가 대폭 증가했다는 뜻이다.

이들의 문제를 나라에만 맡길 것인가?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낡은 속담으로 위정자를 옹호하자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라의 복지정책을 촉진하되 이들 무한경쟁의 희생자들을 구제할 다른 길은 없을까 한 번 생각해 볼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자의 재산을 강제로 뺏어 골고루 나눠 주자 할 것인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나 있는 이들이 자진해서 재산을 내놓도록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최근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는 1910년대 레닌의 공산혁명과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공공개혁을 전기로 '수정자본주의'로 진화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배려를 앞세우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진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의 창조자들이 변화의 선두에 서 있다. "

미국의 예를 들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이 기사는 미국의 최고부자인 <버핏>의 생활철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버핏> 회장의 인생 철학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타인(他人)을 위해 기부하기로 한 결단에서 깊이가 드러난다. 그러니 이 70대 노인이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합리성과 박애정신이 결합된 '인정(人情)자본주의'쯤 될 것 같다."

<합리성과 박애정신이 결합된 인정자본주의>, 이것이라면 우리 민족에게 낯선 화두(話頭)가 아니다. 유교의 측은지정(惻隱之情),불교의 보시(布施)정신은 우리 혈류 속에 이미 짙게 녹아 들어 있지 않은가?

요즘 들어 뜻있는 이들 사이에 기부(寄附)운동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이런 풍조가 녹음방초(綠陰芳草)처럼 무성해지기를 빈다.

 "보시의 기쁨을 모르는 인생은 반쪽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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