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혜의 요새 기벌포 이러한 해양국가인 백제의 수도는 웅진성(공주)과 사비성(부여)이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수가 공주 부근까지 치고 올라갔으므로 도성 근처에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오히려 외침으로부터 도성을 보호하기에
적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여건을 고려해보면 금강 하구에 자리잡은 서천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기벌포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기벌포를 '장암 또는 손량, 다른 한편으로는 지화포 또는 백강(卽長巖,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이라고
하였으며, 백강을 기벌포(白江 卽伎伐浦)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백강을 백마강으로 오해하여 부여 부근의 금강변으로 생각해왔다.
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전북 장수의 신무산(896.8m)과 진안 마이산(678m),
덕유산(1,624m)등지에서 발원해 물줄기는 북서방향으로 흐르다가 무주와 금산일대는 상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안 죽도 유원지,
무주 부남유원지 등을 지나 신탄진에서 갑천과 합류하고, 다시 부강에서 미호천과 합류하여 물줄기의 방향을 서남향으로 틀어 공주, 부여를 거쳐
서해로 유입하는 긴 강이다.
금강은 예로부터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금강은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택리지>에 따르면 금강의 물근원이 되는 상류지역을 적등강(赤登江)이라 하고, 공주 부근을 웅진강,
그 아래를 백마강, 강경강이라 하였다. 또 서쪽으로 구부러져 진강(鎭江 금강 입구, 충남과 전북의 도계)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이러한 금강의 끝자락에 자리한 기벌포는 천혜의 요새지였다.
큰 바다에 접한 전망산 안으로 만이 형성되어 배를 숨겨두기에 적합하였다.
또한 전망산 정상에서는 인근 해역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정찰활동을 하기에 최적이었다.
여기에 바다로 쑥 들어간 비인반도 끝자락에 자리잡은 마량진은 군항 기벌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주저지선 가림성
수도 사비성을 지키는 주저지선은 가림성이었다. 오늘의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성흥산성이다. 성흥산성의 백제 때 본래 이름은 가림성이다.
동성왕 23년(501년)에 백제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으로 금강 하류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1,500미터에 달하는 석성이
산 정상을 테머리 형태로 두르고 있으며 3개소의 우물과 건물지, 초석 등이 남아있다. 662년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도 성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기벌포를 통해 뭍에 오른 당군은 천방산에 진을 치고 성흥산성의 백제 주력군과 대치하였다. 백제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서천군 문산면 신농리
천방산에는 당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이는 당군이 백제군의 방어선을 쉽게 깨뜨리지 못하고 천방산에서 오래 머물렀음을
말해준다.
당군은 오늘의 라궁천을 거슬러 올라 부여군과 경계가 되는 마산면 라궁리와 군간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부여군 홍산으로 진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산에서 부여까지는 평야지대이며 직선거리로 15km 정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다.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정방(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즉 기벌포를 통과하여 사비성을 향한 당나라 병선은 웅진강 입구에서 백제군의 저항에 만나자 왼쪽 해안으로 상륙하여 천방산에 진을 치고
가림성의 배후를 공격한 것이다.
당군이 덕물도를 떠나 사비도성에 당도할 때까지 20여일이 걸렸다. 20여일 동안 백제군은 사력을 다해 기벌포와 가림성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인 것이다.
▲ 마서면 덕암리와 옥산리
사이에 있는 중태산성. 백제시대의 토축산성이다.
■ 천방산과 소정방
문산면에 있는 천방산에는 당의 소정방에 얽힌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소정방이 천방산을 지나 사비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천방산 절에 있는
스님이 말했다.
“이 산을 넘어가려면 천일을 부처님께 제사를 지내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소정방은 “천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인데 어떻게 천일 동안 제사를 지낸단 말이냐”고 말했다. 그래도 천일을 제사지내야 한다고 스님이 말하자
소정방은 궁리 끝에 방을 천개를 짓고 제사를 지내면 천일을 제사 지낸 것과 같을 것이라 말하고 군사들을 시켜 30일 동안 방 천개를 짓도록
했다.
31일째 되는 날 소정방은 부처님께 제사를 지낸 후 사비성을 공격에 나서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비성이 함락된 후 천방산에
있는 방 천 개 때문에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백성들이 빈대를 잡아 천방산 방마다 스님들 몰래 옮겨 놓았다고 한다. 빈대 때문에 견딜 수
없었던 스님들은 빈대를 잡겠다고 방 1개만 남기고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렸다. 천방산은 백제가 멸망 후 방이 천 개라고 해서 천방산이라 불렸다.
다른 전설로는 소정방 군대가 우기를 만나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천방산에다 방 천개를 짓고 한 달 동안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