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은 해양왕국 백제 사비성의 관문이었다
서천은 해양왕국 백제 사비성의 관문이었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8.06.30 00:00
  • 호수 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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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지역발전신문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 연재를 시작하며 서해를 지중해 삼아 중국 월주에서 왜에 이르는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백제에 있어서 금강 하구에 자리 잡은 서천은 수도인 사비성의 관문이었다. 660년 이곳을 통해 나당연합군이 상륙하였다. 서천에는 천방산과 남산성을 비롯해 나당연합군의 상륙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백제가 일본의 지원을 얻어 나당연합군과 벌인 663년 백강전투의 현장은 바로 금강하구였다. 이 싸움에서 제왜연합군이 패해 마지막 왕성이었던 주류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사직은 끊어졌으며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백제 멸망 이후 676년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기벌포 해전도 금강하구인 서천에서 벌어졌다. 이렇듯 서천은 한반도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임에도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못하고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에 기록된 사료를 토대로 당시의 해안선을 도출, 각 지방의 당시 전투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역사의 현장 서천 지역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 기획취재/동아시아 판도 바꾼 국제전쟁 현장 서천 (1) 당의 기벌포 상륙작전 ◇ 해상왕국 백제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의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두통거리가 되었다.(高麗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이는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 나오는 기사이다. 이는 백제 전성기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우리측 사서의 기록이다. ‘백제(百濟)’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사서에 백제인이 등장하는 것은 진(晉:265~419)나라 때부터이다. 위진남북조시대 북조의 역사를 담은 <주서(周書)> 백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송·제·량 때 강좌(江左)를 점거하였으며 북위가 중원을 차지한 후에는 양측에 모두 사신을 보내어 번을 칭하면서 벼슬을 받았다.”(自晉宋齊梁 據江左 後魏宅中原 竝遣使稱蕃 兼受封拜) 여기서 강좌(江左)는 오(吳)·월(越)의 땅을 이른다. 이를 뒷받침하듯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영토를 "서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른다(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고 하였다. 또한 우리의 역사서인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의 땅을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索籍民戶 分封王爵屯戍險塞 軍征賦調悉準內地)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단순한 교류가 아닌 식민지 개척임을 말해준다. 백제는 이들 중국에 있는 식민지를 '담로(담魯)'로 편성해 왕의 자제종친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처럼 백제가 대륙에서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항해술 때문이었다. 백제인들은 일찍이 중국 동해안에서 한반도, 왜를 무대로 무역활동을 벌였으며 황해는 이들에게 실크로드 이상의 편리한 해상 교역로를 제공해 주었다. 뛰어난 항해술로 황해를 지중해 삼아 활동하던 이들 백제인은 멀리 남지나해를 지나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진출하였다. ▲ 백제 전성기 때의 세력권

 

◇ 천혜의 요새 기벌포
이러한 해양국가인 백제의 수도는 웅진성(공주)과 사비성(부여)이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수가 공주 부근까지 치고 올라갔으므로 도성 근처에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오히려 외침으로부터 도성을 보호하기에 적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여건을 고려해보면 금강 하구에 자리잡은 서천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기벌포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기벌포를 '장암 또는 손량, 다른 한편으로는 지화포 또는 백강(卽長巖,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이라고 하였으며, 백강을 기벌포(白江 卽伎伐浦)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백강을 백마강으로 오해하여 부여 부근의 금강변으로 생각해왔다.

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전북 장수의 신무산(896.8m)과 진안 마이산(678m), 덕유산(1,624m)등지에서 발원해 물줄기는 북서방향으로 흐르다가 무주와 금산일대는 상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진안 죽도 유원지,

무주 부남유원지 등을 지나 신탄진에서 갑천과 합류하고, 다시 부강에서 미호천과 합류하여 물줄기의 방향을 서남향으로 틀어 공주, 부여를 거쳐 서해로 유입하는 긴 강이다.

금강은 예로부터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금강은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택리지>에 따르면 금강의 물근원이 되는 상류지역을 적등강(赤登江)이라 하고, 공주 부근을 웅진강,

그 아래를 백마강, 강경강이라 하였다. 또 서쪽으로 구부러져 진강(鎭江 금강 입구, 충남과 전북의 도계)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이러한 금강의 끝자락에 자리한 기벌포는 천혜의 요새지였다.

큰 바다에 접한 전망산 안으로 만이 형성되어 배를 숨겨두기에 적합하였다.

또한 전망산 정상에서는 인근 해역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 정찰활동을 하기에 최적이었다.

여기에 바다로 쑥 들어간 비인반도 끝자락에 자리잡은 마량진은 군항 기벌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조선 영조 때 만든 해동지도에 나타난 금강어귀 기벌포. 전망산 안으로 큰 만이 형성되어 있다. 기벌포에서 뭍에 오른 당군천방산에 진지 구축 가림성 배후 공격 ◇ 천방산에 진을 친 소정방 660년 3월 당의 고종은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다. 당에 와있던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이 신구도행군부대총관에 임명받아 이들의 길잡이로 나섰다. 당의 최정예 군사들인 이들은 산동성의 협주(莢州:오늘의 액현(掖縣))를 출발하여 1,9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6월 21일에 신라의 영토가 된 덕물도(오늘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한편 당고종은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았다. 신라왕은 5월 26일에 신라왕은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이천)에 이르렀다. 신라왕은 태자 김법민(후일 문무왕)으로 하여금 병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가서 소정방을 영접토록 하였다. 6월 21일 덕물도에 정박한 함상에서 소정방과 김법민이 백제를 칠 작전을 세웠다. 당과 신라는 동시에 백제를 협격하여 백제의 각각 방어를 물리친 뒤 합세하여 사비도성으로 진격키로 하였다. 즉 당의 수군은 기벌포로 상륙하고 신라는 탄현을 넘어 7월 10일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신라왕 김춘추는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으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진격토록 하고 자신은 금돌성(지금의 경북 상주 백화산)에 머물렀다. 덕물도에서 휴식을 취한 당군은 웅진강 입구인 기벌포로 향했다. 이들의 동태를 파악한 백제는 금강 어귀인 기벌포에 1차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당시의 해안선을 살펴보면 기벌포가 있는 금강하구는 강이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까웠다. 따라서 많은 수효의 당군이 금강 어귀 도처에서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의 1차 저지선을 공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종천면 장구만에서부터 장항읍 장암리에 이르는 모든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추정된다. 뭍에 오른 당군은 오늘의 마서면 송내리와 장항읍 성주리의 경계를 이루는 왕갯산의 송내리산성과 마서면 옥산리와 덕암리 사이에 있는 중태산의 중태산성, 그리고 남산성을 격파했다. 당시 당군의 상륙작전의 구체적 상황은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당군의 기벌포 상륙의 어려움을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군 소정방, 김인문 등이 연해안을 따라 기벌포로 들어왔는데 해안이 진흙탕이어서 빠지므로 다닐 수 없어 버들자리를 펴 군사들을 나오게 하였다.(將軍蘇定方 金仁問等沿海入依(依當作技)伐浦 海岸泥 陷不可行 乃布柳席以出師)” 시초면 선암리에 있는 신털메는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털메는 해발 20여미터의 낮은 구릉이이다.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진흙 뻘을 지나온 후 이곳에서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서 ‘신털메’라는 지명으로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 당의 기벌포 상륙과 진격로

◇ 주저지선 가림성

수도 사비성을 지키는 주저지선은 가림성이었다. 오늘의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성흥산성이다. 성흥산성의 백제 때 본래 이름은 가림성이다. 동성왕 23년(501년)에 백제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으로 금강 하류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1,500미터에 달하는 석성이 산 정상을 테머리 형태로 두르고 있으며 3개소의 우물과 건물지, 초석 등이 남아있다. 662년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도 성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기벌포를 통해 뭍에 오른 당군은 천방산에 진을 치고 성흥산성의 백제 주력군과 대치하였다. 백제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서천군 문산면 신농리 천방산에는 당군 총사령관인 소정방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이는 당군이 백제군의 방어선을 쉽게 깨뜨리지 못하고 천방산에서 오래 머물렀음을 말해준다.

당군은 오늘의 라궁천을 거슬러 올라 부여군과 경계가 되는 마산면 라궁리와 군간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부여군 홍산으로 진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산에서 부여까지는 평야지대이며 직선거리로 15km 정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가 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다.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 정방(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즉 기벌포를 통과하여 사비성을 향한 당나라 병선은 웅진강 입구에서 백제군의 저항에 만나자 왼쪽 해안으로 상륙하여 천방산에 진을 치고 가림성의 배후를 공격한 것이다.

당군이 덕물도를 떠나 사비도성에 당도할 때까지 20여일이 걸렸다. 20여일 동안 백제군은 사력을 다해 기벌포와 가림성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인 것이다.

▲ 시초면 선암리에 있는 신털메. 당군이 상륙할 때 신에 묻은 진흙을 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뒤로 보이는 산이 천방산이다. ▲ 마서면 송내리와 장항읍 성주리 사이에 있는 송내리 산성. 백제 때부터 금강하구를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 마서면 덕암리와 옥산리 사이에 있는 중태산성. 백제시대의 토축산성이다.

■ 천방산과 소정방


문산면에 있는 천방산에는 당의 소정방에 얽힌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소정방이 천방산을 지나 사비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천방산 절에 있는 스님이 말했다.

“이 산을 넘어가려면 천일을 부처님께 제사를 지내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소정방은 “천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인데 어떻게 천일 동안 제사를 지낸단 말이냐”고 말했다. 그래도 천일을 제사지내야 한다고 스님이 말하자 소정방은 궁리 끝에 방을 천개를 짓고 제사를 지내면 천일을 제사 지낸 것과 같을 것이라 말하고 군사들을 시켜 30일 동안 방 천개를 짓도록 했다.

31일째 되는 날 소정방은 부처님께 제사를 지낸 후 사비성을 공격에 나서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비성이 함락된 후 천방산에 있는 방 천 개  때문에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백성들이 빈대를 잡아 천방산 방마다 스님들 몰래 옮겨 놓았다고 한다. 빈대 때문에 견딜 수 없었던 스님들은 빈대를 잡겠다고 방 1개만 남기고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렸다. 천방산은 백제가 멸망 후 방이 천 개라고 해서 천방산이라 불렸다.

다른 전설로는 소정방 군대가 우기를 만나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천방산에다 방 천개를 짓고 한 달 동안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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