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비 마지막 길 바라보던 남산성
지아비 마지막 길 바라보던 남산성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8.07.07 00:00
  • 호수 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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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여인들의 한 ‘남산놀이’로 전해져
 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  기획취재/동아시아 판도 바꾼 국제전쟁 현장 서천

(2) 사비성의 함락과 백제 부흥군

백제의 왕족들이 포로로 당에 끌려갈 때 백제 여인들은 서천의 남산에 올라 이들의 마지막 길을 바라보았다. 이는 ‘남산놀이’라는 민속놀이로 전해내려왔다. 가림성 무너지자 포위된 사비성 천방산에 진을 치고 가림성(오늘의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의 백제군과 대치하던 당의 소정방은 마침내 군사의 숫적 우세에 힘입어 가림성을 격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였다. 가림성을 지나면 오늘의 부여군 규암면의 평야지대이다. 평원광야에서 당의 대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가림성이 무너지자 웅진강 입구의 방어선도 무너졌다. 이 때의 전투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그 도성으로 나아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삼국사기> 사비성을 감아 흐르던 금강을 천연의 해자로 삼아 마지막 저항을 하던 백제 장군 의직은 이 싸움에서 결국 전사했다.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는 의직의 죽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공주)로 피신하였다. ▲ 성흥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익산시 용안면과 부여군 세도면의 낮은 구릉이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어 백제군은 이곳에 책을 쌓고 당나라 군사를 막은 것으로 추정된다.

탄현을 지나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결사대를 격파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군사들이 당군과 합세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자 왕자 융과 태가 남아 지키다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무열왕의 태자 김법민(후일 문무왕)은 대야성(경남 합천) 전투에서 죽은 누이 고타소를 떠올리고 왕자 부여융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 김춘추는 금돌성에서 나와 7월 29일에 사비성에 도착하였다.


임존성과 흑치상지

8월 2일 소부리성에서는 7월 29일 금돌성(상주)에서 전승 소식을 듣고 달려온 무열왕 김춘추가 참여한 가운데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서부 세력을 거느리고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 전승축하연 이후 소부리성을 탈출하여 1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위치 미상)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남경대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묘비명에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씨(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의 선조는 백제의 식민지였던 흑치국의 총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남부 월(越)에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치국의 위치를 중국의 남부로 추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필리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섰다가 이탈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 하였다."는 데 있었다. 당군이 의자왕을 포로 취급을 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랐음을 말해준다.

임존성(任存城)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해발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석축산성으로 험절함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이 3곳이 있었다. 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투항을 거부한 백제군은 남잠성(南岑城:부여 외곽)과 정현성(貞峴城:진잠)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 남산에 남아 있는 토지신에 치성을 드린 흔적. 남산은 서천주민들의 안식처였다. 소정방의 철수 8월 26일에 신라군이 임존성을 총공격해 보았으나 소책만 깨뜨리고 물러설 뿐이었다. 도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자 당은 백제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듯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4면을 돌아가며 서둘러 글자를 새겼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제목의 이 글로 인해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이 백제를 멸하고 나서 세운 전승기념탑으로 오해되어 해방 후 허물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한다. 소정방은 귀국을 서둘렀다. 10만 이상의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약탈의 방법만으로 조달하기에는 백제 주민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었다. 더구나 신라에서 오는 식량 수송도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고 있는 의병들의 공격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라 또한 당이 군사를 되물려 돌아가도록 압박하였다. 다음 기사를 보면 신라군은 백제군으로 위장하여 당군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미 백제를 멸하고, 사비의 언덕에 주둔하면서 몰래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군신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인 것처럼 그 옷을 입혀서 만약 반역하게 하면 당나라 군대가 반드시 칠 것이니 이로 인하여 싸우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유신이 이 말은 취할 만하니 이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끌려가는 지아비 바라보던 남산성 ▲ ▲ 서천읍에서 바라본 남산성

소정방은 백제를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로 나누어 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한 다음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 및 왕족, 신하들과 백제의 백성들을 배에 태우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사비성에는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 1만 명과 이를 돕는 신라 왕자 김인태의 군사 7천명만 남았다.

소정방이 돌아갈 때 압송한 백제인은 <구당서> 본기나 백제전에는 58인으로 되어있고 유인원의 평백제비명에는 700여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대신, 장사 88인, 백성 12,807인, 신라본기에는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김유신전에는 왕과 신하 93인, 군졸 2만으로 되어있다.

이들이 끌려갈 때 백제 여인들이 지아비들을 마지막으로 전송하던 곳이 서천의 남산성이다. 왕족을 포로로 잡아 갈 때 백제 여인들이 부여 유왕산에 올라 손을 흔들고 서천의 남산에 올라 백제 왕족들의 마지막 길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같은 사건은 1950년 이전까지 민속놀이로 바뀌어 서천지역 여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시집간 며느리들이 친정어머니를 만나는 풍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 민속놀이가 바로 ‘남산놀이’이다.

당의 주력군이 철수하자 백제는 전열을 가다듬고 사비도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동안 나당군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 백제시대 석축산성 남산성 남산은 해발 170m에 불과한 산이지만 시야가 좋아 멀리 금강은 물론 군산시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망권이 넓은 산이다. 따라서 서해안의 움직임 및 금강입구를 감사할 수 있는 요충지로 평가하고 있다. 이 산 정상을 테머리식으로 감고 있는 석축 산성이 지방기념물 96호인 남산성이다. 성 둘레는 620미터에 달하며 정상부에는 건물이 있던 흔적이 있다. 폭 2.6m의 남문터와 2.5m의 서문터가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6∼9m의 통로가 성벽을 따라 돌아가고 있다. 현재 성벽은 남쪽과 북쪽에 남아있고, 붕괴된 지점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안에는 우물이 1개있었으며, 세종 때 지세가 좋지 못하여 읍성을 옮겼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이 세종 때까지는 산성이나 읍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9월 남산성 2차발굴조사를 한 문화재연구원측은 “성벽과 문(門)시설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여러 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벽의 축성수법과 시설의 변화과정을 한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될 수 있다”고 발굴 결과에 대해 평가했다. 영취산으로도 불리는 남산은 절과 암자가 많았으며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지금도 곳곳에서 이러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 서천군 서천읍 남산에 있는 남산성. 산 정상을 테머리식으로 감싸고 있으며 길이는 620미에 달한다.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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