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현을 지나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결사대를 격파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군사들이 당군과 합세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자 왕자 융과 태가
남아 지키다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무열왕의 태자 김법민(후일 문무왕)은 대야성(경남 합천) 전투에서 죽은 누이 고타소를 떠올리고 왕자
부여융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버지가 원통하게도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었다. 그런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7월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의 영군 등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 김춘추는 금돌성에서 나와 7월
29일에 사비성에 도착하였다.
임존성과 흑치상지
8월 2일 소부리성에서는 7월 29일 금돌성(상주)에서 전승 소식을 듣고 달려온 무열왕 김춘추가 참여한 가운데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서부 세력을 거느리고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 전승축하연 이후 소부리성을 탈출하여 1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위치 미상)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남경대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묘비명에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씨(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의 선조는
백제의 식민지였던 흑치국의 총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남부 월(越)에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치국의 위치를 중국의
남부로 추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필리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섰다가 이탈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 하였다."는 데
있었다. 당군이 의자왕을 포로 취급을 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랐음을 말해준다.
임존성(任存城)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해발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석축산성으로 험절함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이 3곳이 있었다. 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투항을 거부한 백제군은
남잠성(南岑城:부여 외곽)과 정현성(貞峴城:진잠)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소정방은 백제를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로 나누어 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한 다음 낭장 유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9월 3일 소정방은 의자왕 및 왕족, 신하들과 백제의
백성들을 배에 태우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사비성에는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 1만 명과 이를 돕는 신라 왕자 김인태의 군사 7천명만 남았다.
소정방이 돌아갈 때 압송한 백제인은 <구당서> 본기나 백제전에는 58인으로 되어있고 유인원의 평백제비명에는 700여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대신, 장사 88인, 백성 12,807인, 신라본기에는 백제왕 및 왕족,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천,
김유신전에는 왕과 신하 93인, 군졸 2만으로 되어있다.
이들이 끌려갈 때 백제 여인들이 지아비들을 마지막으로 전송하던 곳이 서천의 남산성이다. 왕족을 포로로 잡아 갈 때 백제 여인들이 부여
유왕산에 올라 손을 흔들고 서천의 남산에 올라 백제 왕족들의 마지막 길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같은 사건은 1950년 이전까지 민속놀이로 바뀌어 서천지역 여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시집간 며느리들이 친정어머니를 만나는
풍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 민속놀이가 바로 ‘남산놀이’이다.
당의 주력군이 철수하자 백제는 전열을 가다듬고 사비도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동안 나당군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