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군 금강하구 장악·사비성 포위
백제부흥군 금강하구 장악·사비성 포위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8.07.14 00:00
  • 호수 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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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총력 기울인 두량이성 공격 격퇴

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  기획취재/동아시아 판도 바꾼 국제전쟁 현장 서천

(3) 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 7월 13일 사비도성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백제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흑치상지가 항복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임존성에서 항전의 횃불을 들자 곳곳에 건재해 있던 지방의 세력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후 3년 동안 나당연합군과의 처절한 전쟁이 계속되는데 백제군의 주요 근거지는 임존성과 주류성이었다. 임존성과 주류성 임존성(任存城)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분기점인 해발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봉우리들을 에워싼 석축산성으로 험절함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다. 성안에는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이 3곳이 있었다. 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다. 이곳에서 공주와 부여까지의 거리가 90리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 예당저수지에서 바라본 임존성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투항을 거부한 백제군은 남잠성(南岑城:부여 외곽)과 정현성(貞峴城:진잠)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남쪽에서는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을 근거로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다. <구당서>의 기록을 보자.

“백제 승려 도침과 구장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근거로 반하였다. 왜국에 사절을 보내 옛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웠다(百濟僧道琛 舊將福信 率衆據周留城 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豊 立爲王)”

복신은 일본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을 귀국케 하여 왕으로 삼아 사직을 이은 것이다.


백제부흥군에 포위된 사비성

복신은 9월 23일 사비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백제군은 사비성의 남령(부여 금성산)에 올라 4~5개의 기지를 세우고 그곳에 둔취하여 기회를 보며 사비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유인원의 약탈에 시달리던 백제 사람들의 당에 대한 적대의식이 고조되어 20여개 성이 복신의 부흥군에 호응하였다. 이로써 금강하구는 다시 백제가 장악하였으며 사비성은 외부와 고립되고 나당군은 위기에 빠졌다.

이 시기에 위기에 처한 사비성에 있는 당군의 상황이 당장(唐將) 설인귀에 답하는 문무왕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굶주린 당군은 인육까지 먹었던 것이다.

“대군(소정방의 군대)이 철수한 후에 적신 복신이 강서에서 일어나 패잔병을 취집하여 부성을 압박하면서 먼저 외책을 파하여 군자를 탈취하고 다음에 부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몰될 지경이었으며, 또 복신이 부성에 근접한 사처에 성을 쌓고 위수하여 이로 인해 부성에 출입할 수 없었소. 모(문무왕)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의 군사를 푸는 동시에 사면의 적성을 죄다 공파하여 먼저 그 위급을 구하고 다시 양식을 운수하여 드디어 1만명의 한병으로 호구의 위난을 면하게 하고, 진지에 머물고 있는 주린 군사들이 아이를 바꿔 서로 먹는 일이 없게 하였으며(留鎭餓軍 無易子而相食) ” <삼국사기>

이에 당고종은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로 보내고 신라 무열왕은 직접 사비성으로 향하였다. 신라왕 김춘추가 왕문도 일행을 삼년산성(지금의 충북 보은)에서 만났다. 9월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왕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왕에게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 660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를 공략할 때 당나라에서 원정온 장수 유인원의 기공비로서 실질적인 당비(唐碑)이다. 원래 충남 부여군 부소산 중턱에 있었으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겼다. 신라, 고립된 당군 구원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과 함께 10월 9일 이례성(지금 부여의 동남쪽)을 공격하여 10월 18일 함락시키고 사비성 남쪽 백제군의 군책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무열왕은 11월에 다시 왕흥사잠성(지금의 울성산성)을 공격하여 사비성의 당군을 구원한 후 신라로 돌아갔다. 661년 2월 복신은 북쪽의 임존성과 호응하여 사비성을 포위해들어가며 사비성 탈환작전을 다시 펼쳤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당고종은 왕문도의 후임으로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에 임명하여 백제로 급파했다. 복신은 유인궤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웅진강구에 두 책을 세우고 당의 유인궤를 맞았다. 부흥군은 유인궤의 당군이 사비성의 유인원과 합세하는 것을 막고자 총력을 다하였으나 신라군이 합세한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여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양식이 떨어진 신라군이 철수하자 부흥군은 다시 사비성을 향해 포위해 들어갔다. 이 무렵의 상황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인궤가 군사를 엄정히 통솔하고 전전(轉戰)하면서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구에 두 책을 세우고 막았다. 인궤가 신라병과 합쳐 이를 치니 아군이 퇴각하여 책으로 들어와 강으로서 막았는데, 다리가 좁아서 떨어져 빠지고 싸우다 죽는 자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복신 등이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을 보전하였는데 신라인은 양식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용삭원년(661년) 3월의 일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나당연합군에 백제군은 임존성과 주류성으로 물러나 다시 대오를 정비하였다. 도침은 스스로 영거장군(領車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하며 지휘체계를 갖춘 후 군사를 불러 모았다. 세력이 더욱 커진 백제는 사비성을 포위하며 고립된 당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도침이 유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나라가 신라와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삼국사기> 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 복신과 도침이 이끄는 백제군의 포위에 위협을 느낀 유인궤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다시 총력을 기울여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고 또한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주류성을 향해 진격토록 했다. 명분은 사비성의 구원에 있었으나 목표는 백제군의 근거지이자 피난 정부의 도읍지인 주류성이었다. ▲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주류성. 울금바위를 기점으로 동측선이 563m, 서측선이 675m, 총1,238m에 이르며, 동변은 1.010m, 북변은 830m, 서변은 838m로 전체의 평면은 북변이 좁고 남변이 넓은 성벽으로 주위의 총길이 3.960m에 이르는 포곡식 성곽이다.

3월 5일에 품일이 군대를 나누어 먼저 두량이성(豆良尹城:부안군 주산면 사산리토성) 남쪽에서 도착하여 진영할 곳을 살피다 백제의 급습을 받아 패하여 물러났다. 12일에 신라의 주력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고부)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두량이성은 주류성과 근접한 성으로 주류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사비성에서 나와 주류성을 점령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고사비성의 신라군과 두량이성의 백제군은 고부천을 사이에 두고 6km 떨어져 36일을 대치하였다. 지금은 고부천이 흐르는 평야지대였지만 당시에는 조수가 드나드는 개펄이어서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라군은 부득이 4월 19일 군사를 돌이켰다. 대당과 서당은 먼저 보내고 하주 군사가 뒤에 떨어져 빈골양(賓骨壤:정읍 태인)에 다다를 때 백제 군사들이 이를 들이쳤다. 신라군은 많은 무기와 군수품을 잃은 채 퇴로를 서둘렀다.

무열왕 김춘추가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김흠순, 진흠, 천존,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증원케 했는데 가시혜진(加尸兮津, 지금 고령의 가야천)에 이르러 군이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돌아왔다.

신라가 총력전을 편 주류성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곤경에 처한 당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대병을 출병시켜 백제의 근거지를 선점하여 당군의 기세까지 꺾어 백제 영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김춘추의 전략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식량 때문으로 보인다. 3, 4월의 춘궁기에 깊숙히 대군을 침투시키는 것은 무모한 작전이었다.

이즈음에 이르러 복신이 이끄는 백제군은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수도인 사비성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고립된 유인원 등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복신은, “대사(大使)들이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겠노라”고 조롱하였다.

이무렵 기벌포를 비롯한 금강하구는 백제가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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