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벌포 장악이 전쟁 승패 갈랐다
기벌포 장악이 전쟁 승패 갈랐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8.07.21 00:00
  • 호수 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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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기벌포 재장악 사비성 수복 눈앞
당 구원군, 기벌포 뚫고 사비성 합류
 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  기획취재/동아시아 판도 바꾼 국제전쟁 현장 서천

(1) 당의 기벌포 상륙작전
(2) 사비성의 함락과 백제 부흥군
(3) 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
(4) 포위에서 풀린 당군
(5) 제왜-나당연합군의 국제해전 백강전투
(6) 신라와 당의 기벌포 해전

나당군과 백제부흥군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패는 결국 기벌포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사비성을 점거한 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신라가 군사를 내어 기벌포를 통해 당은 본국의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백제는 임존성과 주류성을 주요 거점으로 세력을 재정비하고 왜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사직을 이었다. 사기가 오른 백제는 다시 기벌포를 장악하고 신라의 총공격을 물리쳐 사비성의 회복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웅진도독 왕문도의 후임으로 온 유인궤가 기벌포를 통해 사비성에 입성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신라의 측면 지원 때문이었다. 이후 또한 공격적인 태세를 갖추기 위해 왕도를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풍왕과 복신 사이에 내분이 일었다. 이를 틈타 손인사가 이끄는 당의 구원군은 기벌포 저지선을 뚫고 사비성의 유인원, 유인궤와 합류하였다. 부여풍 귀국으로 사기 올라 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을 격퇴하고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격을 저지시킨 백제는 왜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와 왕으로 추대하였다. 662년 5월의 일이었다. <일본서기>에 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5월 대장군대금중아담비라부련(大將軍大錦中阿曇比邏夫連) 등은 군선 170척을 이끌고 풍장(豊璋) 등을 백제에 보내 백제 국왕의 위(位)를 계승케 하였다.” <일본서기> 천지천황조 부여풍은 의자왕의 아들이 아니라 제왕자(弟王子:의자왕의 동생)의 아들 교기(翹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복신은 부여풍을 모셔오기 위해 직접 왜에 간 것으로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풍왕의 귀국은 백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단절된 사직을 다시 이었으며 주류성은 왕도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백제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남부의 많은 성들이 다시 귀속하였으며 서북부가 모두 응하여 백제는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수도인 사비성의 수복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고립된 유인원 등은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복신은, “대사(大使)들이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겠노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눈앞의 성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었다. 두량이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복신이 도침을 처형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까지 부흥운동은 복신과 도침의 두 세력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승려 도침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서 사원 세력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도성이 함락되자 도침은 이들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독자적으로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복신과 연합하였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복신의 공을 시기하던 도침이 당과 내통하는 것을 탐지하고 도침을 죽였다고 보았다. 지휘 체계가 이분화 되어 일사분란한 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느끼던 복신은 병권을 장악하고 백제의 운명을 한몸에 걸머지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 사실을 짤막하게 기록하였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풍(豊)은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福信殺道琛 幷其衆31) 豊不能制 但主祭而已)”- <삼국사기> 백제본기 ▲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

결정적 위기에 신라 출병

백제는 사비성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며 굶주리고 있는 당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신라와의 교통로인 웅진 동쪽의 진현성(대전 유성구 진잠)이 뚫리고 말았다.   

“용삭 2년(662) 7월에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금산) 및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는 당군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군사를 일으켜 당군을 도왔다. 이 전투에서도 신라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등 19명의 장군을 보내는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이 전투 직후 문무왕 김법민은 대당 총관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목베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함으로써 대백제전에 임하는 군사들의 군기를 바로잡았다. 


 피성 천도

사비성 공략에 실패한 백제는 왕성의 천도를 논의하게 되었다. 피난 정부가 있던 주류성은 배후에 험지가 있고 앞으로는 조수가 드나드는 개펄이 있는 천혜의 요새로 방어에는 유리하였으나 많은 주민을 취합하고 모든 저항 세력을 통합하여 전체 지휘할 수 있는 중심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복신과 풍왕은 피난 정부를 옮기기로 합의하였다.

“병술이 초하루인 겨울 12월, 백제왕 풍장과 그 신하인 좌평 복신이 사네노 무라치와 에치노 다쿠쓰와 의논하여 "이 주유(州柔:주류성을 말함)는 전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니 농잠할 땅이 아니요 방어하고 싸울 장소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백성이 굶주리게 될 것이다. 지금 피성(避城:壁城 즉 오늘의 김제를 말함)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피성은 서북에는 고련단경(古連旦涇)의 물이 띠를 두르고 동남쪽에는 깊은 진흙의 큰 제방이 있어 방비하기에 좋다. 사방에 논이 있어 도랑이 파여 있다. 비가 잘 내리며, 꽃이 피고 열매가 여는 것이 삼한에서 가장 기름진 곳이다. 의식의 근원이라 할 만큼 천지가 깊이 잠겨있는 땅이다. 비록 토지가 낮은 곳에 있지만 어찌 옮기지 않으리오."라고 말하였다. 이때 에치노 다쿠쓰가 혼자 나아가 간언하여, "피성은 적이 있는 곳에서 하룻밤에 갈 수 있습니다. 서로 가깝기가 이처럼 심합니다. 만약 불의의 일이 있으면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대저 굶주림은 후의 일이고 망하는 것은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까닭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축조되어 있어 방어하기에 적합할 뿐 아니라, 산이 가파르고 높으며 계곡이 좁으니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일 낮은 지역에 있으면 무엇으로 거처를 굳게 지켜 동요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 <일본서기> 천지천황조

그러나 풍왕과 복신은 간언을 듣지 않고 12월에 피성으로 왕성을 옮겼다. 여기서 피성은 오늘의 김제이며 동남쪽의 깊은 진흙의 큰 제방은 벽골제를 말한다.

백제가 왕성을 옮기자 663년 들어 신라는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방면을 통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였다. 신라는 김흠순과 천존 등의 장수를 보내 거물성(居勿城:오늘의 거창)과 사평성(沙平城:전남 승주)을 쳐서 항복받고, 또 덕안성(德安城:충남 은진)을 쳐서 1,070명의 백제군 전사자를 내게 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663년 2월의 일이었다.

이렇듯 신라가 다시금 총공세로 나오자 복신과 풍왕은 3월에 다시 주류성으로 피난정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 2개월만의 일이었다.

풍왕과 복신의 내분

천도에 실패한 백제의 지도부에 내분이 발생하였다. 풍왕과 복신간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풍왕은 왕으로 옹립되기는 하였지만 재지적(在地的) 기반이 없었고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명목상의 통수권자로서 정신적 구심점 역할밖에 수행할 수가 없었다. 또한 풍왕은 의자왕의 적자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풍왕으로서는 아저씨뻘 되는 복신이 항상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부흥군의 한 축인 도침을 제거하고, 대중적 인기와 신망을 한 몸에 지닌 백제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였다.

마침내 풍왕은 복신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일본서기> 천지2년(서기663년) 6월조 기록에 다음과 같이 복신의 처참한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왕 풍장이 복신의 모반할 마음을 의심하여 가죽끈으로 손바닥을 꿰어 결박하였다. 그러나 풍장은 자기로서는 처단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신하들에게 “복신의 죄는 이미 이와 같다. 참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달솔 덕집득은 “이와 같은 악역자를 방치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腐狗癡奴)같은 놈아’ 하고 말하니 왕은 건아를 소집하여 복신의 목을 베고 소금에 절였다.“

당 구원군 기벌포 뚫고 사비성 합류

백제의 실질적 지도자인 부여복신을 제거한 백제왕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에 지원을 요청하고 당 고종은 손인사에게 군사 7,000을 주어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과 함께 사비성으로 가서 유인원을 구하게 하였다. 백제는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이 웅진의 유인원과 합류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기벌포를 지켜야 한다. 왜의 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손인사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의 저지를 뚫고 마침내 웅진의 유인원, 유인궤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인사(孫仁師)가 중도에서 이를 맞아 쳐서 깨뜨리고는 드디어 인원의 군사와 합치니 사기가 크게 떨쳤다.(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 후망산에서 바라본 전망산. (옛 기벌포)두 산 사이로 큰 만이 형성되어 구장항제련소가 있는 곳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왔다. “주류성은 부안 우금산성” - 원광대 전영래 교수 주장 주류성의 위치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지라성 또는 주류성(支羅城一云周留城)”라고 하여 지라성(오늘의 금산)을 주류성으로 보았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홍주읍성을 옛날의 주류성(洪州邑城古之周留城)이라고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오늘의 연기군에 있는 원수산을 주류성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한산의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았다.원광대 전영래 교수는 “이같은 추정은 한결같이 어떤 논리적인 고증을 거치지 않은 지레짐작에 불과 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무왕의 ‘답설인귀서’에 “주류성이 무너지자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대를 돌려 북을 쳤다.(南方己定 廻軍北伐)”라고 기록된 기사가 주류성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 단서라는 것이다. 또한 주류성이 함락된 것은 9월 8일이고 나당군이 임존성을 공격한 것은 10월 21일이므로 주류성이 한산이라면 한산에서 임존성까지 130여리밖에 되지 않으므로 군사를 돌려 임존성까지 42일 동안에 가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라는 것이다.이 밖에도 그는 부안의 우금산성은 <일본서기>에서 묘사한 주류성과 주변의 지세가 맞아떨어지고 복신이 거처했다는 굴실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 우금산성(주류성)에 있는 복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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