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 기획취재/동아시아 판도 바꾼 국제전쟁 현장 서천 (1) 당의 기벌포 상륙작전
(2) 사비성의 함락과 백제 부흥군 (3) 신라의 두량이성 진공작전 (4) 포위에서 풀린 당군 (5) 제왜-나당연합군의 국제해전 백강전투
(6) 신라와 당의 기벌포 해전
임존성의 함락
부여풍의 왕성이 663년 9월 7일에 함락되었으나 지수신이 지키던 임존성은 건재했다. 주류성을 함락시킨 나당군은 임존성 공략에 나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10월 21에 첫 임존성 공격에 나선 것으로 되어있다.
신라군의 공격에 문무왕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참여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문무왕은 “한 성을 비록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나머지 성은 모두 항복했기 때문에 그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며 회군을 합리화 했다.
이처럼 임존성의 백제군이 신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임존성의 지세가 험하고 견고하였으며 식량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의 수도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지수신이라는 뛰어난 지휘관이 큰 몫을 했으리라 보인다.
신라군이 회군하자 당군이 임존성 공격에 나섰다. 당의 유인궤는 임존성 공략에 항복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이용했다. 이들은 당이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을 웅진도독 백제왕으로 책봉하여 귀국시켜 신라와 함께 백제의 사직을 잇던 부여풍을 공격토록 하자 당에 항복하였었다.
임존성의 허실을 잘 아는 이들이 공격의 선봉에 나서자 지수신이 이끄는 백제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져 백제부흥군의 첫 봉기지였던 임존성마저 마침내 당에 함락됐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백제부흥군의 저항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4년조(664년)에 백제의 잔존 세력이 사비산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기사가 나온다. 이로써 최후의 항전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웅진도독부의 부흥운동
당은 백제의 고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하였다. 당은 664년 2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주재한 가운데 웅령에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으로 하여금 서맹(誓盟)을 하도록 한 데 이어 665년 8월에는 웅진의 취리산(오늘의 공주 연미산)에서 부여융과 문무왕으로 하여금 맹약을 맺도록 하였다.
유인궤가 짓고 유인원이 낭독한 맹세문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그 내용은 각기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풀어 화친을 맺고 각각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蕃國)으로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취리산의 맹약’에는 부여융과 문무왕 사이의 묵은 감정을 이용해 두 사람 간에 충성 경쟁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향후 고구려를 치는 데 신라의 도움을 원활히 얻어내자는 당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회맹을 통해 백제와 신라의 상호간 영토가 확정되었다. 즉 백제는 절반 가량의 영토를 신라에 빼앗겼는데 백제는 이를 다시 회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본격화 되었다. 문무왕의 답설인귀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총장 원년(문무왕 8년/668년)에 백제가 회맹처에 있어 봉강(封疆:나누어준 강역)을 옮기고 표를 바꾸어 전지를 침탈하고 노비를 꾀고 우리 백성을 유인하여 내지에 숨겨두니 우리 편에서 구색해도 결국 돌려보내지 않았소.”
이는 백제가 상호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잃어버린 구토를 회복하려 했음을 말해주는 기사이다. 즉 백제는 당을 이용하여 영토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한편 당은 이이제이(以夷濟夷)라는 전통적 수법으로 양국을 서로 견제토록 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에 두려 하였다.
신라, 백제 고토에 소부리주 설치
백제 멸망 12년 전인 신라 진덕여왕 2년(648), 당 태종 이세민과 신라의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려 평정 후 영토분할에 대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었다. 이 협정의 골자는 백제 영토의 전부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당이 이러한 약속을 내팽개치자 신라의 문무왕은 일면으로는 평화공세로 나섰지만 그 이면에서는 당과의 일전을 치를 준비를 진행시켰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미 평양성 함락 직전인 668년 9월12일에 문무왕은 왜에 사신을 보냈다. 이는 향후 대당 전쟁을 대비한 왜와의 관계개선 도모였다.
671년 당이 말갈과 연합하여 백제 고토로 남하해오자 신라는 이를 격퇴하고 가림성(부여군 임천면)에 있던 당군의 식량 공급원인 둔전을 짓밟아버렸다. 이로써 신라 문무왕은 백제 고토에 주둔한 당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했다. 이로써 당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부여융의 웅진도독부도 막을 내렸다.
674년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입당해 있던 신라왕 김법민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국왕으로 책봉하여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신라국왕 형제간의 골육상잔을 유도한 이이제이의 수법이었다.
675년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신라 군사를 깨뜨린 후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특유의 유연함을 보이며 또다시 사죄사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명분에 밀린 당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문무왕의 관작을 복구시켰다.
당 세력 완전축출 기벌포 해전 675년에 신라가 다시 고구려 고토의 남경을 쳐서 주군을 설치하자 9월에 설인귀가 쳐들어 왔다. 신라 장군 문훈이 맞아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9월 29일에 이근행이 말갈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경기도 양주)에 주둔하였는데,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말 30,380필을 얻었다. 이로써 육상에서의 당군은 완전히 패퇴하기에 이르렀다.
676년 11월, 설인귀의 함대는 금강 어귀 기벌포로 침입하여 사찬 시득이 지휘하는 신라의 함대와 격돌했다. 신라의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곧장 전열을 수습하여 무려 22차례의 파상적 공격전을 감행해 마침내 설인귀의 당군을 물리쳤다. <삼국사기>는 기벌포 해전을 다음처럼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로써 신라는 서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여 이후 당의 수군은 압록강 남쪽 해역으로 진출하지 못해 한반도 내에서 병참기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의 원정군 파병은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기벌포는 7세기 후반 동아세아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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