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公私)갈등
공사(公私)갈등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9.22 12:00
  • 호수 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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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식우송정보대학 교수

추석명절을 보내면서 생각해 본 내용이다. 서로들 선물을 주고받고 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갑작스러운 의문점도 들기 시작하였다. 바로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이라는 단어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가 경계선인지 궁금해졌다.

형식과 내용의 갈등이 시작된 셈이다. 남들도 다 하니까 고맙다고 생각되는 대상에게 선물을 준 것인지, 아니면 전통에 따라 나눔의 미덕을 누리려했던 것인지 많이 혼돈스러웠다. 전자로 치자면 잘 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내지는 잘 봐달라는 이해관계형 친교술이요 후자로서는 불우한 이웃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전업주부 연봉도 연관지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사노동 가치를 현실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에서 월 433만원이 도출되었다고 한다. 주부들의 고생과 어려움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의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만 있다는 전제도 틀린 것 같고 이를 빌미로 선량한 미덕이 변질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가져보았다.

솔직히 이러한 잡념의 근본에는 과연 내가 다수의 이익을 위한 존재인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서 생기는 현상인 듯싶다. 오히려 공익을 가장한 사익 추구형 삶은 아닌지, 아니면 당당한 사익추구가 공공이익이라는 그늘로 박탈당하는 것은 아닌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예전에 기록했었던 글들을 새삼 되짚어 보았다. 옛날 어느 나라에 전쟁이 났다. 외부세력이 쳐 들어온 것이다. 이때에 국가경영을 책임진 왕과 신료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모두가 하나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가? 후일을 기약하며 귀한 혈통만은 보존하겠다고 왕(王)을 핑계 삼아 살아남아야 하는가?

경찰이 도둑을 쫒고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경찰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과연 우리는 경찰을 도우며 공의(公義)를 위해 앞장 설 수 있는가? 또는 남의 일에는 절대 참견하지 말자며 바로 피해 버릴 것인가? 수업시간에 학생이 질문을 한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들이 갑자기 이상해진다. 질문 때문에 수업이 늦게 끝날 것 같다고 모두들 핀잔을 주는 눈치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여기에는 반드시 두 명의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합리화에 의한 자신이다. 내가 할 때는 로맨스요, 남이 할 때는 불륜이라 합리화하는 이중성 말이다. 은혜와 감사는 흐르는 물에 새기고 분노와 원수는 돌에 새겨 가면서까지 어리석은 세상살이는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소 어렵긴 하겠지만 자기 자신의 이익을 객관 타당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꾸려나갈 때, 바로 이것이 자존심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수신제가(修身齊家)가 중요한 단어로 다가오는가? 여전히 수련을 더 해야 할 듯싶다.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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