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하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기획취재 / 금강하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8.10.06 15:02
  • 호수 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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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금강하구 개조

일제, 수탈 위해 금강하구 개발
장항-군산 급성장·여타지역 쇠락

강하구 원형 파괴·식민지 경제 불안정 내포

1. 일제의 금강하구 개조
2. 개발성장주의와 금강하구 갯벌
3. 끝없이 쌓이는 토사문제
4. 제련소가 남긴 것
5. 국립생태원과 해양생물박물관
6. 금강하구와 지속가능한 경제

 

◆ 연재를 시작하며

금강은 그 유역면적이 9,912.15㎢로 한국에서는 한강, 낙동강에 이어 3번째로 큰 강입니다. 일찍이 백제 문화의 본류를 형성하였으며 내륙 수운이 발달하여 물류의 중심이었습니다. 더구나 인근의 만경강, 동진강과 함께 서해로 흘러들며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거대한 하구역갯벌을 이루어 서해 황금어장의 배후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한반도 서해안 남부의 중심인 이곳 금강하구를 주목하여.쌀 수탈과 어업의 전진기지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한 때 번성을 구가하는 듯 했으나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왜곡된 개발정책으로 그 한계가 노출되었으며 특히 장항제련소로 인해 아직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정부에 의해 금강하구 지역에서 추진되어온 개발성장정책은 일제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군산 쪽의 과다한 갯벌매립과 하굿둑의 건설로 그 부정적인 영향은 서천에서도 고스란히 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 되면서 장항을 비롯한 서천군의 전역은 침체의 늪에 빠져든 지 오래입니다. 또한 강 하구의 자연환경과 인문지리, 지역문화를 도외시한 채 온갖 개발정책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아직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 이어질 전망입니다. 또한 금강하구 일원에서는 막대한 국비를 들여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들어설 예정이며 충청내륙권의 개발로 그 관문이 될 금강하구지역은 다시 한번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뉴스서천>은 그동안 금강하구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주시해왔으며 많은 문제점들을 밝혀냈습니다. 앞으로 6회에 걸쳐 입체적인 분석을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한 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우리나라의 큰 강들은 대부분 서해로 유입되는데 만조 때에 강을 거슬러 올라간 조수가 간조 때에 급히 빠져나가면서 퇴적물을 먼 바다까지 끌고 내려가 풀어놓는다. 그래서 서해안의 강 하구에는 삼각주가 나타나지 않고 서해 연안 전체에 걸쳐 갯벌이 넓게 발달했다.

이처럼 천혜의 자연조건이 낳은 우리의 서해 갯벌은 육지로부터 영양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며 지구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어족자원이 풍부해 한반도에서는 좁은 땅이지만 많은 인구가 살아갈 수 있었다.

쌀 수탈 위해 강 하구 매립

만성적인 식량부족국가인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자 이러한 갯벌에 눈길을 돌렸다. 개를 막아 논으로 만드는 간척사업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갯벌을 매립하는 법적 근거는 공유수면매립법이다. 일제는 1917년에 이 법을 만들어 시행하면서 이를 근거로 간척사업을 벌여 1938년까지 178곳에서 405.4㎢의 갯벌을 매립했다. 이는 썰물 때 뭍으로 드러나는 조간대 상부 갯벌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갈대가 무성하던 옛 장항에도 일제의 손길이 미쳐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다. 가타끼리라는 일본인에 의해 솔리천 하류 지역에 방조제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1906년 조선으로 건너와 전북 익산에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그는 전북 군산과 옥구에서 간척사업을 벌이는 한편 금강하구의 북쪽인 서천에도 손길을 뻗친 것이다.

1997년에 발간된 장항읍지인 <장항의 역사와 문화>에 따르면 일본인 지주들에 의해 1923년에 서천수리조합이 설립되었고 1924년에 옥남방조제가 완공되어 서천의 비옥한 평야의 살이 일본으로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장항의 지리적 잇점을 파악하고 장항항의 개발에 착수했다. 장항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의도였다.


장항선 개통으로 장항 급부상

1912년에 군산선이 개통한 데 이어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라는 사설 회사가 천안에서 장항에 이르는 144.2km의 철도를 놓기 시작하여 1922년 6월 1일 충남선이라는 이름으로 천안에서 온양까지 개통하였으며 이후 1931년 8월 1일에 전구간을 개통하였다. 해방 이후 철도는 국유화 되었으며 1955년에 장항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장항선이 개통되자 일제는 항만 건설을 서둘렀다. 일제는 장암진성을 헐어 용당산과 후망산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갯벌을 메워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1932년에 성대한 축항식에 이어 3천톤급 기선이 접안할 수 있는 3백톤급 대형 부잔교 2기, 소형 부잔교 1기, 목잔교 4기가 설치되었다.

일제는 쌀 수탈뿐만 아니라 장항항을 광물자원의 수탈기지로 삼고 금 생산에 역점을 두었다. 장차 중국 대륙을 침략하려 했던 일본은 침략전쟁에 필요한 석유, 제철, 공작 기계 등을 미국 등 여러 나라로부터 수입하는데 있어서 결제수단으로 금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망산에는 높이 90m의 굴뚝을 세우고 장항제련소를 짓기 시작하여 1935년까지 대부분 시설을 들여앉혔다. 1936년에 점화하여 용광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산금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총독 우가키(宇坦一成)가 장항에 제련소 준공식에 참석하여 천혜의 조건에 감탄을 표했다고 한다.

 

수산업 중심지로 번성 누려

철도가 개통되며 장항항은 급속한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철도가 수운을 대신하면서 강경포구의 역할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조기의 성어기인 3~6월에는 하루 백 여척의 배가 드나들었고 여각, 객주, 상선을 갖춘 거상들이 이곳을 찾았다. 1900년 말 일본 영사의 조사에 따르면 1년 동안 금강을 오르내린 선박이 1만 5천여척이이었다.

금강은 강의 흐름이 완만해진 하류지역에 이르러 400~500석의 쌀을 실은 선박이 오르내렸다. 충남의 공주, 은진, 부여, 임천, 한산, 홍산과 전북의 용안, 함열, 임피 등은 이러한 내륙 수운과 관련이 깊은 곳들이다. 하항으로서 갖는 강경포의 상업기능은 차츰 호남선 철도에 넘어가게 되었고 1931년 장항선이 개통됨에 따라 강경포는 충남 서남부의 상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강바닥에 토사가 유입되어 수심이 차츰 낮아지면서 금강 중하류 지역의 포구들은 그 기능 서서히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에 장항은 군산과 함께 급부상하며 상업기능과 함께 어항으로서도 수산업이 발전하며 전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수탈 목적을 위한 철도에 힘입어 강경을 중심으로 한 금강 하구의 오랜 인프라를 깨뜨리며 맞이한 것이었다. 또한 주변 지역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식민지 경제의 특성에 따른 불안정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또한 강하구의 원형은 이 때 이미 파괴되었다.

 

   
▲ 192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조선 지도의 금강하구 부분. 장항으로 들어가는 길은 제방으로 되어있고 오늘의 장항읍 옥남리 일대는 염전이다.
▲ 용당산과 장암리 지구지를 직선으로 둑을 쌓고 매립하여 조성된 장항시가지
▲ 솔리천 주변의 장항들판. 일제가 1924년 옥남방조제를 막아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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