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잔
빈 잔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6.13 12:06
  • 호수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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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웅순 칼럼위원
빈잔에서 몇년을 앓았던 지난날의 쉼표와 마침표들. 힘든 것, 아픈 것들 다 주고 떠난 젊은 날의 그 많은 낱말들은 어디에 있을까. 

설움도 다녀가고 고독도 다녀가고, 새벽 달빛도 소쩍새 울음도 빈잔을 다녀갔다. 빈잔은 여름 산처럼 적막했다.

이순 앞에서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이립에 떠났던 생각들, 불혹에 떠났던 사색들이 이순에 와서야 집으로 돌아오는가. 십년은 주막에서 잔을 비우고 십년은 골목에서 패싸움 하고 나머지 십년은 창살없는 감옥에서 천자문을 외웠다.

이제야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돌아오는 늦저녁 길. 산녘을 돌아오다 문득 산그림자와 맞닥뜨렸는지, 물가에 비친 주름진 산에 흠찔 놀랐는지 편안한 미소 띤 얼굴이다.

인생은 빈잔인지 모른다. 비워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빈잔인지 모른다. 그 동안 내 곁을 떠났던 낱말들이 그 많은 빚을 갚지 못하고 그 많은 짐을 벗지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비천한 세월들을 비우고 있다. 그 때마다 술잔에는 그믐달이 뜨고, 먼 섬도 뜬다. 얼마나 아득하기에 내 술잔에서 아득히도 뜨는 것인가.

빈잔은 누구의 입술이기에 그토록 급하고, 빈잔은 누구의 젖가슴이기에 이리도 벅찬 것인가. 짐은 어디에서 오고 빚은 또 어디로 가고, 잃어버린 것들은 또 어디에서 굽을 트는가.

아름답게 살고 싶다. 소중하게 살고 싶다. 애틋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빈잔으로 살고 싶다. 인생은 한조각 구름, 한줄기 바람으로 허공에 성호를 긋고 가는 것이 아닌가. 

파도 소리, 바람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천둥소리, 소쩍새 울음도 잘 들리지 않는다. 내 가슴에 하늘과 바다가 없고 내 가슴에 산과 강이 없고 그래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소리가 커서 너무나 적막해서 잘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침묵과 기다림이 없었더라면 나는 영원히 귀가 멀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입이 멀 차례이다. 그 옛날 빈잔 앞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침묵을 쏟아내고 얼마나 많은 말을 내뱉었는가. 그들의 빚과 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입다물 밖에.

오늘은 정성껏 안주를 마련해준다. 빈잔이 외롭게 보였나보다. 아내의 가을은 이미 어머니의 가을처럼 붉고 깊어져가고 있었다.

술잔에 내 얼굴이 붉게 비친다. 그것은 술에 취해 붉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붉어져서 붉게 비치는 것이다. 아내는 술에 취해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빈잔이 놓여있었다. 한줄기 새벽 바람이 빈잔 위를 스쳐가고 있었다. 

<시인·평론가, 중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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