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국 기자
  • 승인 2009.08.24 13:19
  • 호수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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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웅순 칼럼위원
설움과 한을 산마루에 쏟아놓고 천둥으로 울고 간 먹구름. 산모롱이를 뒤로한 채 말 못하고 떠난 만추의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들이 버리고 간 가죽나무 삭정이, 벌레 먹은 땡감, 탱자나무의 누런 잎새. 그렇게 사계절 좌절만을 남겨놓고 떠난 내 고향집 울엔 질경이와 강아지풀들이 웃자라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라지, 원추리, 엉컹퀴, 패랭이꽃이 좋아서, 산바람, 물소리, 산새 울음이 좋아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치기만 해도 까무러칠 것만 같은 산등성 무꽃, 메밀꽃. 참깨꽃. 생각만 해도 눈물날 것만 같은 솔방울 소리, 빗방울 소리, 솔바람 소리. 밭에서 일하고 주인과 함께 긴 산그림자를 끌고 왔던 처얼렁 처얼렁 저녁 워낭소리. 해거름 묻혀질 때까지 나를 길게 따라와 울어댔던 찌잇쯔 찌킷쯔 물총새 울음 소리. 세상을 살면서 이젠 부서질 때다 되었건만 유년 시절 유전 형질이 차돌처럼 굳었는지 아프게도 그리운 것은 내 천성만이 아닐 것이다.

흰눈이 퍼얼펄 날리는 날 속옷 벗겨진 하얀 산자락에 화제를 쓰고 간 겨울새의 울음 소리. 장끼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간 눈밭에 낙관을 찍지 못해 붉어져간 젊은 날의 매바위. 긴 여백의 허전한 붓 끝, 파르르 떨던 나의 먹빛은 어디로 번져 갔는가. 어디쯤에서 멈춰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가.

산기슭에도 획 하나가 빗나가고 산모롱이에도 획 하나가 휘청하던 불혹의 여리디 여린 필세. 그것은 수십년 물소리와 섞이고 새소리와 섞이면서 빚어낸 간절한 나의 기도였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들녘을 외면하며 서럽게 바라보던 뒷산의 기인 기다림이었다. 그 때마다 갈대밭은 언제나 닿지 않는 저쪽에서 하얀 그리움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을 뿐…….

한 번쯤 말을 건넬 수도 있으련만 산은 반세기 동안 내게 한마디 말도 건네주지 않았다.  그 때마다 꽃으로, 녹음으로 말하는 것이 전부였고 낙엽으로, 흰눈으로 손짓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산을 바라보았지, 산이 나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 이 지독한 짝사랑이 지난 반세기 동안 나에게 긴 기다림과 침묵을 강요해왔다. 침묵하는 산을 바라보며 침묵을 배우지 못하고 기다리는 산을 바라보며 기다림을 배우지 못한 나는 차안(此岸) 밖의 머나 먼 섬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그 자리에 언제나 서 있는 산을 반세기 동안 쳐다만 보았지 깨닫지를 못했으니……. 산에게도 나에게도 기가 막혀 할 말이 없다.

물소리, 산새소리, 바람소리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과 서러움에 잠 못 이루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고, 침묵과 기다림에 애태우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산의 숨소리를, 산의 질책을 새소리, 물소리, 솔바람 소리로 언제나 아름답게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의 아침 서곡.

언젠가는 우리들이 가야할 산. 이름 모를 산새들이 울고, 풀꽃들이 피는 누구도 지나쳐가야할 이름 모를 산기슭에 한 줌의 뿌연 먼지로 흩어져갈 우리들의 육신이 아닌가. 공수래 공수거 세상사 여부운이 아닌가.

만날 수 없는 그 자리에, 말 못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산. 강물에 젖지도, 노을에 젖지도 못하고 서 있는 산, 그래서 산그늘조차 쓸쓸하고 허전한 산.

나는 잠 못 이루는 한여름 밤 소쩍새 울음이라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모른다. 머나먼 섬인 나는 육지의 자그락 자그락 해조음 소리라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모른다.

<시조시인·평론가·중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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