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설날의 풍속화
오래전 설날의 풍속화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02.22 13:30
  • 호수 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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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 칼럼위원

내일 모래면 설날이다.

집 앞에서 500m 저쪽 남북으로 뻗은 서해안 고속도로에 엊그제부터 교통량이 부쩍 늘었다. 밤에는 자동차의 불빛이 꼬리를 물고 느릿느릿 움직인다. 아들 녀석들은 때마침 해외에 출장 나가 있고, 딸아이더러는 교통지옥에서 고생스러우니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으면서도 고속도로를 메운 자동차의 행렬을 보고 공연히 그리움에 젖는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무렵의 어느 설날이 떠오른다.

지난 가을에 이사 와서 처음 맞는 설날이었다. 작은 집에서 살다가 안마당과 타작마당이 갖추어 있고, 비록 초가집이지만 위채, 아래채, 그리고 허드레 곳간으로 쓰이는 행랑채까지 갖추어진 집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집 앞에 열두어 마지기 쯤 되는 옥답도 그 해 같이 장만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늘 당신의 한복을 잘라서 내 설빔을 지어주셨는데, 그 해는 새 옷감을 끊어다가 햇솜을 넣어 옷을 지어 주셨다. 아마 꽃분홍치마에 노랑저고리였을 게다.

곱게 차려 입고 서둘러 차례를 지냈다. 이웃에서 상망제 올리는 곡소리가 나기 전에 차례를 올려야 한다고 서두르신 것이다. 평소에는 구경조차 못하던 음식들로 배를 채운 우리 삼남매는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고 덕담도 들었다.

“여자는 설날 아침에 남의 집에 가는 거 아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께서 타이르신 말씀이지만 열 살짜리 계집애가 귀담아 들을 리 없다.

길 건너 점순이네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점순이를 불렀다. 사립문도 없는 점순네는 아직 차례를 지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음식그릇을 나르던 점순이 어머니가 내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부엌문을 닫았다.  점순이도 내다보지 않았다. 그 때 점순이 어머니는 배가 만삭이셨다. 점순이는 다섯째 딸이고, 그 어머니는 일곱째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설날 아침에 처음 오는 사람이 남자면 아들을 낳고, 여자면 딸을 낳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 때문에 그 집 또 딸 낳으면 어찌하냐 하시며 어머니께 몹시 꾸중을 들었다.

나 때문이었는지 점순 어머니는 한 달도 채 안 되어 딸을 낳았고, 그 후로도 딸을 둘이나 더 낳으셨다. 

아침 댓바람부터 꾸중을 들었지만 아버지를 따라 큰집에 세배하러 가는 나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큰집은 아버지의 큰 당숙 되는 어른 댁인데, 문중의 큰 어른이셨다.

큰 집은 집도 무척 크고 마당도 넓었다. 수염이 긴 큰할아버지는 옛날에 서당선생님이셨다는데 병환이 있으셨던지 보료 위에 눕거나 앉아계셨다.

큰집에는 할머니가 두 분 계셨다. 키가 크고 천천히 걸으시며 늘 웃지만 별 말씀이 없으신 큰 할머니와, 대를 이을 손을 보려고 큰 할머니 당신이 선택하여 들이셨다는 작은 할머니가 계셨다.

작은 할머니는 키가 자그마하고 살집이 있고 늘 안팎으로 종종 걸음을 치셨다.

나붓이 큰절을 올리고 인사말씀까지 올리는 나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웃으며 칭찬하셨다. “고 녀석 언변이 좋아서 크게 되겄어.”

유과며 강정은 너무 달고 맛있었다. 조청을 바르고 찰벼, 수수, 조 따위를 튀겨 옷을 입힌 유과는 큰할아버지 댁에 와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다 큰 재종숙들은 ‘삼촌, 삼촌’ 하며 꽃분홍치마자락을 나풀거리며 쫓아다니는 나를 유독 귀여워 해주었다.

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들을 차례로 찾아뵙고 세배를 올렸다. 여자는 설날 아침 일찍 나다니면 안 된다는 말 따위는 까맣게 잊은 나는 맛있는 음식과 칭찬과 덕담에 최고의 설날을 보냈다.

그 때는 모두 한마을에 모여 살아 참 좋았는데……. 그 때의 친척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실까?

전화벨소리에 깜짝 놀라 수화기를 든다. 큰 아들 놈이다. 거기도 마침 주말과 기념일이 끼어서 설이 연휴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란다. 오늘은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세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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