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비
만추의 비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11.08 10:30
  • 호수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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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칼럼위원

▲ 신웅순 칼럼위원
어느덧 우수수 낙엽지는 만추의 끝자락에 서 있다. 이순의 고갯길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뻐꾸기가 온종일 울다간, 소쩍새가 밤새도록 지우다간 세월. 이젠 그런 산과 들이 낯설고 고향 같은 마을이 낯설다.

참으로 멀리 왔다. 산 넘고 들을 건너 긴 둑길을 걸어 참으로 멀리도 왔다. 불빛은 보이지 않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거기에서 꼭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어머니 같은 불빛. 그것이 내 인생인지 모른다.
나는 고등학교, 대학을 외지에서 다녔다. 그리고 시인이 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고향은 고향이 아니었다. 둥지도 틀지 못한 채 삼십이 못 되어 훌쩍 고향을 떠났다.

기약도 없는 먼 여행길. 출가한 사람처럼 직업도 신분도 벗어버리고 느티나무, 팽나무, 소나무, 둑길, 산길, 바위를 뒤로 한 채 고향을 떠났다. 벼랑 끝을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랐다. 미련도 원망도 없는 하루하루, 그런 주경야독의 십년을 보냈다.

어느날 나는 또 한 차례의 옷을 벗었다. 이제는 버릴 수 없는 것까지 다 버리고 수행자로  먼 길을 떠났다. 나와 내가 만나지 못하는 갈림길, 주야독 십년의 반은 내 인생에 있어서 제일 길고도 먼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위해 지난 십년을 쉴새없이 달려왔는가. 나만을 위해 지난 십년을 하염없이 걸어왔는가. 한심하고 야속했다. 시간시간 떠도는 구름, 하루하루 정처 없는 바람이었다.

나는 두 차례나 나를 버렸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철부지였다. 하도 철이 없어 놓고 가기 불쌍했던지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아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벌써 대학에서 공부한지 십오년. 나를 떠나 있었던 그 때 그 시간 만큼 또 한 세월이 흘렀다. 내 하고 싶은 이것이 진정 인생에 있어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로인해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 동안 부모를 잃고, 고향을 잃고, 아내도, 사람들도 잃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더없이 소중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버렸다.

다하지 못한 부모, 다하지 못한 고향, 다하지 못한 아내, 다하지 못한 사람들. 인생을 잘 못 산 것은 아닐까. 그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애틋하고 간절한 것들은 아닐까. 인간적인 사랑을, 사람다운 향기를 느끼지 못하고 산 것은 아닐까. 그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어떻게 속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 것인가.

만추의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예전 그대로의 저 먼 산과 들녘. 축축히 젖은 그 때의 추운 부모와 고향을 생각한다. 나를 낳아 길러주고, 쫓아냈던 언제나 그리운 곳.   기도하며 내 뜨거운 영혼을 닦아주었던 곳, 그것이 부모와 고향의 품이 아닌가.

축축히 젖었던 그 때의 내 아내를 생각한다.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내게 힘을 실어 주었던 아내. 내 마음 속을 혼자서 읽어 주었던 아내, 내 행동을 혼자서 받아들었던 아내. 내 의지를 혼자서 빗질해 주었던 아내. 아내는 내 인생의 참으로 가깝고도 고마운 친구였다.

산과 들에는 붉은 물이 든다. 조금 있으면 활활 타오를 것이다. 뜨겁게 살아 무거웠던 잎들을 다 태우고, 툭욱, 툭, 자신의 무게를 지상에 버릴 것이다. 이내 하얀 눈발이 와서 남은 열정을 차분히 식혀줄 것이다. 
이순에서 나는 어떻게 붉어가야 하나. 붉은 죄값들을 나는 어떻게 태워가야 하나.

비가 그치면 만추의 햇살은 빗발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 빛나는 눈부신 잎새 앞에 죄 많은 내 이야기들을 어떻게 변명해야할까. 이제와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촉촉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축복과 은총은 받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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