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 고개
보릿 고개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13.04.22 15:12
  • 호수 6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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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는 5,60년 대만해도 농촌에서는 연례행사처럼 다가오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양식이 바닥이 나고 보리가 여물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추풍령보다도, 태산보다도 더 높은 고개였다. 설익은 보리를 삶아먹고, 보리목채 불로 구워 먹었던, 보리 수확을 기다리며 넘고 넘던 눈물겨운 고개였다.


  보릿고개는 바로 우리 민족의 가난의 상징이었다.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진다는 이홍렬의「바위고개」,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다는 윤용하의「보리밭」,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 늴리리 분다는 한하운의 「보리피리」,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밤새 붉은 울음 운다는 서정주의「문둥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의 아프고 고단했던 마음을 위로해주고 달래주었던 서럽고도 절절한 우리의 음악이었고 시였다.

     하늘은 낮고 산은 깊었었지
     유난히도 진달래꽃 붉게 핀 해였었지

     남몰래
     산 너머 가서
     울었었던
     그 봄비
            -필자의「어머니 21」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남자 아이들은 농사일을 도왔고 여자 아이들은 집안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남자 아이는 무작정 상경하기도 하고 여자 아이는 부유한 집으로 식모살이 가기도 했었다.
남몰래 뒷곁에서 봄비처럼 서럽게 울었을 그들. 서울 가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돈을 많이 벌자. 돈을 많이 벌자’ 수 없이 되뇌었을 그들이 지금의 5,60대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천지가 보리 농사였다. 농촌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주 먹거리인 중요한 밭농사였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보릿고개는 그만 보리 농사와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 보리가 이제는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강식이 되었으니 초등학교 때만해도 부황기로 얼굴이 누렇게 뜬 학생들이 많았는데 참으로 격세지감이요 상전벽해이다.


  보릿고개는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초근목피의 보리꽃 피는 고개가 아니었더면, 진달래 붉게 피는 바위 고개가 아니었더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인가.


  나는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껄그러워서가 아니요 퍼슬퍼슬 해서가 아니다. 그 때 그 쉰 듯한, 바람결에 스치던 그 보리 냄새가 싫어서이다. 건강에 좋다는데 그 냄새가 나에게는 또 하나의 보릿고개가 되었으니 가난했던 그 옛날을 까마득히 잊은 것인가.


  초근목피로 버텨왔던, 그 힘든 보릿고개 철에 우리에게 무슨 숙명 같은 것이 있어 지금도 진달래꽃과 보리꽃은 해마다 피고 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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