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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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4.01.13 10:10
  • 호수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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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최근까지도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조리한 인간들, 분열된 자아, 지중해의 이글거리는 햇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자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혼자 믿어버렸으며 나중엔 확신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행복의 충격’ 이라는 김화영 교수의 책을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1960년 1월 4일, 파리로 가는 국도에서 빙판에 미끄러진 차 한 대가 가로수를 받고 멈췄다. 그리고 그 차 뒷좌석에 앉았던 승객 까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의 품엔 미처 발표하지 못한 작품 ‘최초의 인간’ 원고와 파리행 기차표가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는 죽기 전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각색해 무대에 올린 연극 연출가였다는 거다. 그의 연극은 꽤 성공적이어서 지방 순회공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생의 마지막까지 의욕적으로 살다 간 예술가였다.


내가 이 사실을 우울과 죽음에 매료되어 있던 20대에 알았다면 어땠을까? 실망했을까?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죽음보다 삶에 더 가까이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안심이 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은 끌로드를르슈 감독이 만든 영화 ‘남과 여’까지 이어졌다. 이 영화를 고등학생 시절에 봤는데 꽤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제 막 사랑의 감정을 느껴가는 두 남녀가 해안가를 거닐며 대화를 나눈다. “집에 불이 났는데 안에 렘브란트의 그림과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남자가 물었다. “고양이를 구하고 그에게 자유를 주겠어요.” 여자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춘기의 나는 그림처럼 보여주기 위해 멈춰버린 순간을 사는 것보다는 자유의 삶을 사는 고양이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일기에 쓰기도 했던 것 같다. 고양이는 진짜 살아있는 삶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해하고 있던 죽음의 진실과 오래된 영화 속 대사는 느닷없이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밀양의 할머니들을 떠오르게 했다.
가끔씩 신문에 올라오는 밀양 할머니들의 모습은 죽음에 더 가까워 보인다.
검고 주름진 얼굴과 오랜 노동의 흔적을 안고 있는 거친 손가락, 깃털처럼 가벼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몸 때문이다.


그런데 그 노인들이 불통 정부와 거대 한전을 상대로 삶을 이야기하며 싸우고 있다. 그저 오랫동안 살아온 땅에서 삶을 이어가고 싶다며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외치고 있다. 
거대한 굴삭기 앞에서 소리치고 움직이고 눈물짓는 그들을 보며 나는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과 고양이를 본다.


밀양의 뜨거움 속에서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노인들의 삶을 정부는 구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대로 , 또 살고 싶은 대로 그들에게 기꺼이 자유를 줘야 한다. 거대한 송전탑 아래서 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노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그들은 삶과 더 가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곧 삶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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