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서사 소감
봉서사 소감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14.03.10 13:52
  • 호수 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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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한산의 건지산성은 내 어린시절의 초등학교 소풍지였다. 나당연합군에 대항,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성내에는 암자같은 작은 절, 봉서사가 있다. 내 어린 시절 소풍길에 잠시 쉬었다 간 아늑한 봄빛 같은 절이다. 언제나 살구꽃이 피어있고 복숭아꽃이 피어있을 것 같은 절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절과의 첫만남은 봉서사였다. 지금까지도 절이라하면 맨 먼저 떠오는 절이 봉서사이다.
  봉서사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곳은 조선 후기 시인이자 필자의 8대 선조 석북공께서 공부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것이 후손인 내게 무의식적으로 감응해서였을까. 그 극락전 편액도 석북공이 쓰셨는데 어느 때인가 그 편액은 다른 편액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물어보니 아는 이가 없다. 참으로 애석하다. 누군가가 고이 보관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풍경소리 어둠 밖을
     등잔불 이어가고

     한올 한올 숨을 뽑아
     무릎에 감는 슬기

     온 밤을 잉아에 걸고
     백마강물 짜아가네
                 - 신웅순의 ‘모시·5’

  서른살 쯤 나는 봉서사를 생각하면서 이 시조를 썼다. 어린 시절의 따스한 봉서사의 언덕, 풍경과 요사채의 등잔불을 생각하며 썼다. 고향집에서 모시 삼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썼다. 토담 움막에서 철컥철컥 모시 짜는 이웃 여인의 새벽을 생각하며 썼다.


  패망한 백제 왕조와 유민들의 한을 강물처럼 모시에 싣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는 번번이 실패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내 의식의 일부를 지배해온 백제의 한 그리고 한산 모시. 봉서사는 나에게는 그렇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백제의 패망, 유민들의 한, 석북공, 금강물, 베틀, 모시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그리움이었다.


  봄이 왔다.
  벌써 예순하고도 네 번이나 내 곁을 왔다가 갔다. 올해의 봄은 여느 때와는 다른 것 같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가슴에 있는 찌꺼기 일부를 비워낸 것이 남아서일까.
  그릇은 비울수록 맑은 소리가 난다는데 나는 얼마를 비워내야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렸을 적 봉서사의 풍경소리. 까마득 잊어버렸던 그 풍경 소리를 이제와 다시 듣고 싶은 것은 나에게도 어린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어서인가 보다.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데 내게는 그런 날이 있기나 하는 것인지. 마음으로는 끊어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데 귀머거리도 듣지 못하는 것을 낸들 어이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욕심없는 마음으로 어릴 적 그 풍경 소리를 들었으니 그 때 그 소릴 보지 않았는가 싶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봉서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모른다. 바람 불면 봉서사의 풍경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내 가슴에서 울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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