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과 책임에 대하여
약속과 책임에 대하여
  • 심재옥 칼럼위원
  • 승인 2014.04.14 14:55
  • 호수 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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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너댓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천방지축이던 아이가 조금씩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가 많아졌다. 위험한 일이거나 해서는 안될 행동에 주의를 주고 일방적인 행동을 교정하느라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았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먼저 타겠다고 떼쓰면 안된다거나, 사람들 많은 데서 뛰거나 장난치면 안된다거나, 어른들께는 인사하고 존대 말을 해야 한다거나, 횡단보도에서는 파란 불이 반짝하면 건너야 한다거나… 점점 더 많은 주의를 주고 행동을 제지하는 엄마가 불만이었던지 아이의 투정도 늘어났다. “왜 나는 나중에 타야 돼?” “왜 뛰면 안돼?” “왜 어른들에게 반말하면 안돼?”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는데, 어린 아이에게 질서와 규칙이라는 것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떤 설명에도 아이는 자기의 욕구가 당장 제지 당하는 것을 못참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는 이렇게 외쳤다.
“난 세상이 싫어! 세상은 왜 규칙이 있는 거야! 난 규칙 싫어!”


나는 아이의 그 외침으로부터 행동규범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통제하는 일은 아이에게는 특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규범을 지키고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인 지금까지도 힘겹게 배워가고 있다.


최근 ‘기초선거 정당공천’ 문제로 정치권의 들썩임을 보노라면 그 옛날 우리 아이와 나눴던 규칙에 관한 일들이 생각난다. 어린 아이들조차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작금의 정치는 아이들만큼의 도덕율도 책임성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규범을 둘러싸고 여야가 벌이는 공방과 헤프닝은 과연 우리 사회의 운명을 맡겨도 좋을 만큼 그들이 책임있는 세력들인지 회의가 들게 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는 이미 여야의 공약 이전부터 위헌 소지가 경고되었고, 정당정치의 위축,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정치 대표성 약화 등 책임정치 측면에서 반대가 많았던 사안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약으로 내걸었고 또 그걸 이유로 공약을 폐기했다.
 새누리당의 무책임과 뻔뻔함은 그야말로 도덕 불감증 수준이다. 그렇다고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며 어떤 비판에도 귀를 닫고 외통수로 치달아오다가 최근 여론조사와 당원투표로 기초단위에 정당공천을 하기로 결정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치행위도 책임있는 정치라고 보긴 어렵다.


구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전격적인 합당의 전제조건이 정당공천 폐지였다는 것에 나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성하고 단식하고 회의하고 집회하고, 대통령 면담까지 요구한 사안이 정당공천 폐지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라니! 정치가 책임져야할 모든 사안들을 압도할 만큼 정당공천 문제가 과연 정치를 개혁할 핵심과제이고 절박한 문제인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정당공천 문제로 여야가 뜨겁게 공방을 벌이던 그 한 달여 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생계가 막막한 세모녀의 죽음이 있었고, 생계비관의 가족 동반자살이 줄을 이었다. 부양의무자 폐지를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광화문 지하도 농성이 500일을 넘겼고, 강정과 밀양과 가로림만의 일방적 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맞고 끌려가고 경찰서에 갇혔다.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과 자살이 이어졌고 무수한 국민들이 삶의 한계 앞에서, 정부정책의 부조리한 철벽 앞에서 풀잎처럼 쓰러져 갔다. 그런 한 달 동안 정치는 정당공천 문제만 얘기했다. 그리고 지방선거는 이제 채 두 달도 남기지 않고 있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가 새정치’라는 슬로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약속의 내용’이고 그 약속의 결과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이다.
기존 정치제도의 형식과 규칙을 바꾸는 것에 집착하느라 ‘정치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새정치가 아니다.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국민들의 더 나은 삶과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정치는 여전히 폐기해야할 낡은 정치일 뿐이다.


65세 이상 기초연금 지급, 4대 중증질환 의료비 부담완화,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제, 군 복무기간 단축, 반값 등록금 등 이미 박근혜 정부로부터 폐기 당한 복지공약의 부활을 위해 싸우는 것, 빈곤과 환경파괴와 부조리한 정책으로부터 국민들의 삶을 지키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정치가 국민들에게 해야 할 약속이고 가장 중요한 책임 아니겠는가.
<전 진보신당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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