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서천의 생태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 (3)생태계 보존과 생태관광
■ 기획취재/서천의 생태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 (3)생태계 보존과 생태관광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4.10.27 17:17
  • 호수 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조제 막으면서 고흥군은 망했다"
관 지원에도 텅빈 어촌체험마을

*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고흥반도 지도. 동쪽의 해창만, 서쪽의 고흥만에서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다. 해창만과 고흥만을 막은 후 수산업이 쇠퇴했다.

생태계를 잘 보존하여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사례를 경남 창녕의 우포늪과 전남 순천의 순천만 갯벌의 경우에서 살펴보았다. 뉴스서천 취재팀은 전남 고흥반도를 방문해 고흥군의 생태관광을 알아보았다.<편집자>

◇간척사업으로 훼손된 생태환경

전남 고흥군의 고흥반도는 동쪽으로는 여자만, 서쪽으로는 득량만을 끼고 있어 큰 강이 유입되고 있지는 않지만 작은 하천이 흘러드는 하구갯벌이 발달해 생태환경이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고흥반도는 동서 양쪽으로 여자만과 득량만이 있고 다시 그 안에 해창만과 고흥만이 있었다. 해창만으로는 고흥천과 송산천, 신흥천 가학천 시목천, 포두천, 우산천 등이 흘러들며 천혜의 하구갯벌이 형성된 곳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대부터 굴껍질을 갯벌에 넣어 종패가 붙게 하는 ‘노지식 굴양식’의 시원지로 알려졌다. 곳곳에 염전도 많아 염전 면적만도 20ha에 이르렀다 한다. 일제 때부터 시작된 해창만의 간척사업은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때부터 본격화 됐다. 1963년 2월부터 방조제 공사가 시작되어 1969년 7월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468만평의 논이 조성되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역에서 병어, 도미, 쥐치, 낙지, 고막, 바지락 등이 지천이었는데 방조제가 완공되며 대부분 사라졌다.
이러한 간척공사는 서쪽 득량만 쪽에서도 벌어졌다. 1991년 고흥만 방조제공사가 착공되어 1995년에 2.87㎞ 길이의 방조제가 완공됐다. 갯벌은 논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방조제 안쪽에 745ha 규모의 담수호가 생겼다.
담수호의 수위 조절을 위해 담수가 수시로 배출돼 주변 어장의 평균 생산량이 20% 급감하자 어민들은 2007년 소송을 제기했으며 지금까지 법정 다툼을 이어지고 있다. 1심 법원은 “어촌계에 72억여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고흥만에 지천이던 꼬막이 사라졌다. 현재 낙지 채취와, 바지락 양식 등으로 수산업의 명맥을 잇고 잇다.
고흥읍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방조제를 터야 돈이 돈다”며 “방조제 막으면서 고흥군은 망했다”고 말했다. 1960년대 해창만 방조제 공사 시작할 무렵 20만이던 인구는 현재 7만으로 줄었다.

▲ 고흥만 방조제

◇텅 빈 어촌 체험마을

2011년 전라선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고흥군은 문화관광 사업에 주력을 쏟고 있다. 나로호 발사지로 유명세를 탄 나로도 우주센터와 우주과학관을 주축으로 삼아 인근 어촌마을을 생태관광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해돋이와 해넘이를 동시에 볼 수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밴 발포역사전시관도 들러볼 만 한 곳이다.

▲ 풍류리해수욕장

지난 19일 고흥읍에서 12km쯤 북쪽 두원면 풍류리에 위치한 풍류어촌마을을 둘러보았다. 득량만으로 흘러드는 고흥만을 막은 고흥방조제 바로 옆 마을로 60여 가호가 사는 어촌마을 이었지만 간척사업 이후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다. 바닷가에는 작은 포구와 아담한 해수욕장이 있다.
▲ 군에서 지원한 어촌체험마을 시설

20011년 고흥군은 이곳을 어촌체험마을로 지정하고 각가지 시설을 지원해주었다. 여름이면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법 북적인다. 그러나 여름 한 철 뿐이다. 마을은 다시 텅 비고 6개나 되는 횟집도 모두 문을 닫는다. 그 지역 고유의 체험할 소재는 생태계가 살아있어야 가능하다.
마을 어촌계에서 바지락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생산량은 신통치 않다. 포구에는 출어를 한 적이 없어 보이는 빈 배들만 매어 있다. 비린내가 풍기고 어구 수선작업으로 부산해야 할 물양장에서는 수확한 벼를 말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생태계 파괴와 함게 마을은 활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같은 생태계의 파괴 현장에서 군에서 지원을 쏟아부어도 생태관광이 이루어 질 리 없다.
▲ 풍류리 어촌체험마을 포구


//////////////////////////////////////////////////////////////////////////////////////////////////////////////////////////////////////////////

◆보전이냐 보존이냐 - 핀쇼와 뮤어

산업혁명을 거치며 발전한 과학기술은 수많은 발명품을 낳으며 숲을 대규모로 파괴하였다. 벌목업자와 광산업자, 석유채굴업자는 떼돈을 벌며 자본을 축적하였으나 숱한 동식물이 멸종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산업사회가 무분별하게 개발을 진행하던 19세기말 미국에서 숲에 대한 반성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보호에 대한 이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두 부류가 미국의 초대 산림국 장관이었던 핀쇼(1865~1946)의 환경보전(保全)론(preservation)과 시에라 클럽의 창설자 뮤어(1836~1914)의 환경보존(保存)론(conservation)이다. 핀쇼 등 보전론자는 인간이 자연환경으로부터 장기간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 기업에 의한 무한한 수탈로부터 자연환경을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즉 보전론자에 있어서 자연환경은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는 수단으로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뮤어 등 보존론자는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어떠한 인간 활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보존론자에 있어서 원생자연은 종교적 명상의 원천, 현대 생활의 피난처 그리고 미적 체험의 장소이며 또 그 자신이 내재적 가치를 갖기 때문에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당초 미국의 건국사에 있어서 산림과 원생자연은 극복되어야 할 위협이고 정복되어야 하는 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원생자연을 정복하면서 비로소 미국은 오늘과 같은 문명과 문화를 쌓아올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핀쇼의 보전론 역시 진보주의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물 부족 해결을 위한 헷츠헷치 계곡의 댐 건설을 두고 핀쇼와 뮤어의 입장이 확연히 다름을 보여주었다. 뮤어는 댐 건설을 반대했지만 핀쇼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찬성한 것이다. 핀쇼와 뮤어는 특히 원생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전적으로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으며 핀쇼는 인간이 이용할 수 없는 이론이나 ‘성역’으로서의 원생자연의 보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원생자연의 개발이 미국 전토에서 현저하게 확대되는 가운데서 더 이상의 원생자연을 파괴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원생자연 그 자체를 성역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뮤어의 자연보존론이 널리 파급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