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기운 왕성-수왕골, 변혁운동가 고시상·고광규 배출

서천군지에 따르면 조선말 시왕면 주절리(注切里)와 얼달리 일부, 초처면의 지곡리, 용곡리 일부를 병합해 태성리로 했다. 마을 이름은 시루봉 정상에 테머리식 석축산성인 태성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태성1리 백범기 이장은 “옛날에 나무하러 시루봉에 갔을 땐 석축 흔적을 보곤 했는데 지금은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풍정리 향정마을 앞의 ‘뱃고쟁이’, 봉선리의 ‘배문이’ 등의 지명으로 보아 지금의 길산천 주변의 평지는 백제시대에는 바다였다. 이 때 풍정리-봉선리-태성리를 잇는 해안선은 금강 입구와 수도인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는 전초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정리는 향정마을의 ‘정(亭)’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뜻하며 풍정리 산성과 태성은 그 중심 거점이었을 것이다. 특히 태성은 길산천 본류와 도마천이 합류되는 지점을 아우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왕(水旺)골은 물의 기운이 왕성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길산천과 도마천이 시루봉과 화서뫼를 앞 뒤로 둘러싸고 흘러나가므로 물의 기운을 많이 받는 곳이다. 수왕골은 다시 큰수왕골과 작은수왕골로 나뉘는데 마을 앞 들판에 배수로가 정비되지 않았던 시절 침수피해를 자주 입었다 한다. 백범기 이장에 따르면 모를 심어놓았지만 낫들고 논에 가본 적이 없던 때도 있었다 한다. 침수피해를 입고 나면 논에 ‘택사’라는 약재를 구황작물로 재배하기도 했다.
수왕골에는 수령 500년쯤 되어보이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마을 수호신으로 삼아 해마다 대보름 아침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화합과 안녕을 비는 ‘고목제’를 지내는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수왕골 북쪽 지금의 봉선지 무너미 건너편 마을이 ‘냉갱이’라 불리는 곳이다. 찬 우물(冷井)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3가구가 살고 있다. 태성1리는 2008년 ‘범죄없는 마을’로 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봉선지 제방 아래에 있는 주절리는 ‘물 흐름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건너편 마산면 이사리 산줄기 사이로 길산천이 흐르는데 1926년 일제가 제방을 막아 이름 그대로 물 흐름이 끊어졌다. 제방 길이는 불과 100여미터에 불과하다.
주절리 이장 고광협씨에 따르면 제방 아래 물문까지 뱀장어와 참게가 올라와 밤에 횃불을 켜고 이들을 무수히 포획했다고 전한다. 먼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드나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곳은 관정을 뚫으면 짠물이 나온다고 한다.


고시상(1884~1961)은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날 오후 1시경 기독교도 송기면 등은 준비한 7천여 매의 태극기를 모여든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劉性烈)을 잡아 경찰출장소로 연행하였다.
이에 고시상은는 양재흥(梁在興)·박재엽(朴在燁)·김인두(金印斗) 등과 합세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와 기물을 파괴하며 강제로 연행 당한 송기면 외 6명의 동지를 탈출시키고 계속 시위를 이어갔다.

한편 이 마을 출신 고광규(1891~1972)는 1923년 서천수리조합설치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23년 4월 서천수리조합설치를 허가하자 서천지역 2230명이 서명 날인한 탄원서를 가지고 충남도와 조선총독부를 항의 방문했다.<자문/유승광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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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규의 서천수리조합 설치 반대운동
지난 26일 기벌포문화마당에서 발간한 <서천의 근·현대사>(유승광 지음)에는 서천수리조합 설치 반대운동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다음은 이 책에 기술된 내용이다.<편집자>

이 때 수리조합 설치에 적극 앞장 선 사람들은 대개가 일본인 대지주와 일부 조선인 지주였다. 하지만 수리조합 설치는 조합원 1/2이상, 토지 면적 2/3 이상의 소유주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당시 서천수리조합은 구역 내 토지 소유자 1832명 가운데 1016명이 동의했고 동의자의 소유 면적은 구역 내 총 면적 3262정보로 70.6%의 동의를 얻어 설립조건은 충족되었지만 법정 기준을 약간 넘어 받대운동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다음은 1923년 5월 6일자동아일보 사설 일부이다.
“그리하여 민간의 불평은 날로 높아가나 한편으로 조합 당국자들은 군청의 협력과 도청의 양해를 얻어 교묘히 l허가를 얻었으므로 태연자약히 지난달 26일(1923년 4월 26일)에 군청에서 (조합원)총회를 열게 되었는데 총회에 출석하라는 통지장은 몽리 구역이나 피해 구역이나 기타 반대자에까지 모두 발부하여 놓고 (조합원총회) 식장에는 일일이 감시를 하여 조합 사업에 찬성할 듯한 사람 외에는 통지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도무지 입장을 시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일반(조합원)은 크게 분개하야 식장으로 돌입한 일까지 있었다.”
이런 사실은 서천수리조합 설치 총회가 일부 일본인 대지주나 조선인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편법총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부터 일반 반대자들은 각 면에서 2명식 대표를 선발하여 대표회의를 열고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필요치 아니한 수리조합의 불법태도를 들어 반대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해 5월 16일 고광규를 비롯한 나석주, 조남천 등 3인의 대표는 2230명이 서명날인한 탄원서를 가지고 도청과 조선 총독부를 항의방문했다. 이에 총독부 사회과장은 “근본적으로 부정한 사실이 있고 또는 수리조합이 일반에게 해를 끼친다 하면 허가된 것이라도 다시 취소할 수 있으나 수년을 지내면 얼마나 유익한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대답했다고 1923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가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재차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보도가 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서천수리조합장 카네히라는 부임 6개월만에 해임되었으며 조합 평의원으로 창설 당시 6명, 일본인 10명이던 것이 조선인 10명 일본인 8명으로 바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