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의 마을 이야기/(8)문산면 금복리
■ 서천의 마을 이야기/(8)문산면 금복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3.14 11:07
  • 호수 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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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산천-판교천 분수령 놋점이고개
선비들모여 예학 강론하던 회사동
‘회삼귀일’ 말하는 듯 쇳골 삼지적송

▲ 쇳골 삼지적송
길산천이나 판교천의 중·하류 지역의 평야지대는 먼 옛날에는 바다였으며 해안선이 차츰 후퇴하면서 마을들은 이러한 하천들의 하구 쪽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천 상류에 자리잡은 마을들은 하천과 산이 얽혀 이루어진 매우 복잡한 지형 속에 자리잡고 있다.

▲ 백두대간 개념도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의 전통 지리사상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으로 요약된다. 이에 근거해 나온 책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산경표(山經表)>이다. 백두산을 근본으로 하는 산의 족보인 <산경표>에서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를 1대간 13정맥으로 분류해놓았다. 서천군의 산들은 어떤 맥을 이어오고 있는지 산경표를 통해 알아보자.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산줄기가 금강산-태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으로 이어지며 동해와 서해로 흐르는 강들 나누었다. 속리산에서 한 산줄기가 서북쪽으로 흐르다 안성 칠장산에서 다시 한 산줄기가 뻗어나와 안성천과 금강의 수역을 가르며 서산, 태안 방면으로 뻗어간다. 이것이 금강 북쪽에 있다 해서 금북정맥으로 이름붙였다. 금북정맥은 홍성 오서산에서 한 줄기가 남하하여 보령의 성주산, 서천의 장태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신산경표에서는 해서기맥이라 한다.

장태봉은 서천군 모든 산들의 근본이다. 장태봉에서 산줄기는 동쪽으로 뻗어가며 마루금은 서천군과 부여군의 경계를 이룬다. 판교면 복대리에서 4번국도를 건넌 산줄기는 다시 가지를 쳐 한 산줄기가 길산천과 판교천의 수역을 가르며 남하하면서 천방산을 이루고 오늘의 군청 뒷산에서 소멸된다. 문산면 길산천 수역의 첫 동네가 금복리(金福里)이다.

▲ 금복리 위성사진
조선 말에 금복리는 서천군 두산면의 지역으로 진북굴, 짐북굴 또는 금복(金福), 북계(北溪)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중리(中里), 평전리(平田里), 유점리(鍮店里), 북계리(北溪里), 원동리(院洞里), 노오리(老五里)를 합하여 금복리(金福里)라 해서 서천군 문산면에 편입됐다.

▲ 놋점이고개에서 본 금복리
문산면 소재지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옛 시문중학교를 지나 저수지를 끼고 큰 골짜기 지형이 나오는데 이곳이 금복리이며 길산천의 지류인 도마천의 상류지역이다. 1987년도 대홍수로 엄청난 피해가 난 곳이다. 많은 집들이 반파되거나 전파되고 인명피해도 2명이나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해 피해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하천과 논들이 도마천 상류까지 잘 정비돼 있다.

금복교 못미쳐 우측으로 10여호 가량의 마을이 산기슬에 있는데 이곳이 금복리 첫마을 쌍봉마을이다. 금복교를 건너면 왼편 골짜기에 제법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빗돌에 ‘안태마을’이라 씌어있다. 금복3리이다. 40여호가 사는 이 마을에 금복보건진료소가 있다.

이 마을 입구를 지나면 ‘삼지적송’이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금복리의 줌심 마을이라 할 수 있는 금복2리 중말 나온다. 중말에서 왼편으로 골짜기를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금복정사가 나오고 그 위 원진산 중턱에 삼지적송이 있다. 이 골짜기를 쇳골이라 부르는데 철이 많이 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쇳골 삼지적송
수령이 350-400년으로 추정되는 삼지적송은 높이 20여미터의 독립노거수로 웅장한 모습으로 뻗은 세 가지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고른 세력을 보이고 있어 사뭇 경외심을 자아내고 있다.
나무는 “비록 갈라져 살고 있지만 그 뿌리는 하나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원효대사는 법화경에서 삼국통일의 정신적인 구심점을 찾고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다 일시적인 것이며, 보다 더 큰 한 그릇 속에 하나로 뭉쳐 합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삼지적송은 바로 이러한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말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삼지적송의 영향을 입은 탓인지 금복2리는 어느 마을보다 단합이 잘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이장에 따르면 옛날부터 이 나무에 영검이 있다하여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이 나무에 치성을 드려오고 있다고 한다.

중리 마을회관에서 동쪽으로 금복교회를 지나 낮은 고개를 넘어가면 산기슭에 20여가호의 마을이 나온다 이곳이 원당 마을이다. 이 고개를 함정고개라 하는데, 이 고개에는 큰 짐승이 많아서 산 짐승을 잡느라고 함정을 파 놓았던 고개라고 전한다.

중리 마을 입구를 지나 판교 방면으로 가다보면 큰 노거수가 나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골짜기가 보이는데 이곳에 20여가호가 사는 회사동(會士洞)이다. 회사동은 부여 옥산과 인접한 월명산이 있고, 옛날 성리학이 한창 흥할 때 선비들이 모여서 예론을 논하던 자리가 있어 회사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옛 선비들이 강론하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골짜기 끝 부분에 ‘명주사’라는 이름의 작은 절이 있다.

회사동을 나와 다시 판교방면으로 가다 고개를 넘기 직전에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이곳이 놋점이라는 마을이다. 유점, 유점리라고도 한다. 옛날에 유기를 만들어 파는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 놋점이마을에 있는 여양진씨 열녀비각
문산면과 판교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름은 놋점이고개이다. 놋점이고개는 판교에 우시장이 성황을 이룰 때 장날인 4일에나 9일에는 한산, 마산, 화양 등 인근에서 소를 끌고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다 한다.
놋점이 마을에는 ‘숙인 여양 진씨 열녀문’이 있는데, 유병식의 여양 진씨는 동서간에 우애롭고 부부간에 공경하고 순종함을 근본으로 했다 한다. 남편으로 하여금 학문에 힘쓰게 하고,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자 정한수를 떠놓고 빌어 대신 앓기를 원했는가 하면, 시부모 몰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남편의 회생을 도모했다고 서천군지에 전한다.

놋점이 마을 맞은편에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지형이 있는데 이곳을 우라실이라 부르며 그 아래에 5가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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