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닭띠 갑장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데스크 칼럼/닭띠 갑장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7.01.04 16:08
  • 호수 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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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띠 갑장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허정균/편집국장

닭은 어둠을 떨치고 새 아침을 여는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정유년 닭의 해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정유년에 거는 기대가 크다. 500여년 전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살았던 당시에도 나라 안 정세는 요즘과 비슷했다. 1501년 신유년생 닭띠 갑장인 두 인물은 어떻게 당시에 시대 정신을 구현했는지 알아본다.

조선 건국 후 권력을 잡은 신흥사대부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공신(功臣)을 양산해내며 부와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들이 훈구파이다. 한번 공신에 책봉되면 공신전과 노비가 지급되며 자자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이어갔다.

한편 중소지주층으로 지방에 거점을 둔 온건개혁파들은 향촌에 머물며 후학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이들이 대거 관직에 나선 것은 성종 때에 와서의 일이다. 성종 임금은 깨끗한 사림파로 하여금 훈구파를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선조 때에 와서 사림파가 확실하게 권력을 잡게 될 때까지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때로는 훈구파간에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이 있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이 이 기간에 있었다.

이러한 난세에 백두대간 태백산과 지리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줄기 하나씩 곁에 두고 은둔하며 남송의 주자를 철저히 닮으려 했던 사람이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이황과 조식은 한창 공부할 시기인 나이 스물에 기묘사화를 목도했다. 스승들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었겠는가.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던 이황은 을사사화를 보면서 자신의 처세가 옳았음을 확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명종이 그를 수차례 불렀으나 번번히 출사를 거절하였으며 도산서당에서 후학들을 기르는 데 전념했다.

조식 또한 중종과 명종이 수차례 불렀으나 단 한 차례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관찰사가 만나자고 청해도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나이 60이 넘어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임진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와 정인홍 훗날 서인 동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를 시작한 동인의 영수 김효원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들이 추구했던 학문은 성리학이다. 공자 맹자의 고대유학과 구분하여 성리학을 중세 유학이라고도 하는데 그 핵심 철학은 이기이원론이다. 이를 완성한 사람은 남송의 주희였다.  주희는 금나라가 송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은 열등하고 사악한 기가 순수하고 올바른 이를 억압하고 있는 상태로 보았다.
성리학을 처음 받아들였던 고려 말에 정몽주나 길재도 부패한 권문세족을 기로 보고 자신들 신흥사대부들을 이로 보았다. 이황과 조식도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의 어지러운 조선 사회를 바라보았다. 훈구파를 기로 보고 사림파를 이로 본 것이다. ‘동방주자'라고도 불리는 이황, 그리고 조식의 이러한 이기이원론은 당시 사림세력뿐만 아니라 훗날 붕당정치로 갈려졌을 때에도 동인, 남인들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며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은 조선조 명종 때 정난정의 국정농단과도 비유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당시 어지러움을 피해 은둔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 후세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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