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년 기념 특집/월남 이상재 선생과 헤이그 평화회의②상동청년학원과 헤이그 특사 파견
■창간18주년 기념 특집/월남 이상재 선생과 헤이그 평화회의②상동청년학원과 헤이그 특사 파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7.10.17 22:59
  • 호수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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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선생에게서 민족운동 눈뜬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우당 이회영과 함께 특사파견 논의…고종 신임장 받아

 

▲ 고종황제의 신임장.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전시)

◇상동교회로 모여드는 우국지사들

 

상동교회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이 서울 남대문에 설립한 교회이다. 숯장사 출신 전덕기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던 이 교회는 구한말 정치적 단체가 활동하기 어려운 시기에 많은 우국지사들이 만나며 소통을 하던 장소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곳에서 좌장격이었다.

전덕기는 1875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9살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숙부 밑에서 성장했으며, 남대문에서 숯장사를 하던 작은아버지를 도와 숯장사를 했다. 이 무렵 스크랜튼은 정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소외계층과 빈민층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다 더 민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대문으로 옮겼다.

전덕기는 그의 나이 17세에 스크랜튼을 만나 고용인으로 들어갔다.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스크랜튼의 인품에 감화된 전덕기는 그를 도와 교회를 짓고 21세에 세례를 받아 감리교인이 되었다. 교회의 권사-전도사가 되며 빠르게 성장한 그는 민중을 찾아 거리로 나섰으며 민중 목회를 사명으로 여겼다.  1888년 상동교회를 설립하자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었다.

전덕기는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이후 이상재, 남궁억, 정교 등으로부터 민족문제에 눈을 떴으며 독립협회 서무부장으로 안살림을 맡았다.
1903년 5월 상동청년회를 재조직하고 전덕기는 회장이 되었다. 또한 중등교육을 담당하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해 민중계몽운동의 중심지로 이끌었다. 이 무렵 월남 이상재 선생은 개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감옥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특사로 풀려난 이상재 선생은 이 무렵 상동교회에서 전덕기를 비롯 이회영, 김구,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박용만 등을 비롯 많은 애국적 지식인들과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또한 월남 선생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으며, YMCA 교육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6월 목사 안수를 받은 전덕기는 한국인으로는 5번째 목사가 되어 상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상동청년회 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전덕기, 정순만, 이동녕, 김구, 이시영, 이준, 최재학 등은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결의했다. 11월 27일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 앞에서, 11월 30일 종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상동교회가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1906년 초 일제 통감부는 스크랜튼을 압박했다. 이에 굴복한 스크랜튼은 자신이 관할하는 모든 교회의 청년회가 교회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조직으로 변질되었다면서 청년회를 해산했다. 선교에 유리하다며 친일 성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상동청년학원은 살아있었다. 1907년 전덕기는 상동청년학원을 4년제로 늘렸다,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고 애국인사들은 교사로 참여했다. 원장에 전덕기, 학감 이회영, 국어 주시경. 역사 최남선 등이 맡았다. 이후 상동교회는 을사늑약 무효투쟁(1905)의 중심이 되었으며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특사 파견과 신민회 결성의 산실이 되었다.

◇이준, 고종 신임장과 함께 헤이그로

▲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장인 네덜란드 왕궁에 있는 비넨호프리더잘로 각국 대표들이 모여들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 의회 건물
▲ 오늘의 비넨호프리더잘 모습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초청국 명단을 넘겨받은 네덜란드는 1907년 4월 9일자로 1907년 6월 15일 회의 개최를 통보하는 서한을 초청국에 보냈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한제국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상동청년학원은 곧바로 이 소식을 접하고 전덕기 목사와 이회영 등은 특사 파견 논의를 시작했다. 1년 전 해외로 망명한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 3인의 특사는 이 때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부사인 이준(1859~1907)은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1887년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했으며,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1902년 이상재·민영환·이상설·이동휘·양기탁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 운동에 참여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에 모인 전덕기·최재학·정순만·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위종(1887~ ?)은 이범진의 아들로 외국공관장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아버지가 주러시아 공사가 되자 뼤쪠르부르그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일본 정부가 소환령을 내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뼤쪠르부르그에 머물며 외교활동을 계속하던 중 약관의 나이인 스물에 특사 일행에 합류했다.

문제는 고종의 신임장이었다. 일제의 감시를 뚫고 이를 손에 넣는 데에는 전덕기 처의 이종 언니인 김상궁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한다.

고종 황제의 신임장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이위종에게 주는 신임장

대황제는 칙서를 내려 가로되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하는 바라,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로부터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여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7일에 있어서 일본이 아국에 대하여 나라 사이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리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했다.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적 야심은 인도에도 위배되는 것이기에 좋게 기록할 수 없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종이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평화회의에 나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하건대 이번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열차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배를 탄 이준은 4월 23일 부산을 출발해 4월 26일 블라지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이상설과 합류한 특사 일행은 5월 21일 블라지보스토크를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 6월 4일 뼤쪠르부르그에 도착했다.

뼤쪠르부르그에서 이위종과 합류한 특사 일행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2세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베를린, 브뤼셀을 경유해 회의장이 있는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회의 개회일로부터 10일이 지난 6월 2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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