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
■ 책소개/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8.01.31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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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으로 가라앉은 남태평양 섬에
코로 걸어다니는 포유동물이 있었다”

다리는 퇴화되어 먹잇감을 움켜쥐거나 털을 고르는 데에 사용되고 코가 이동 수단으로 진화하여 코로 걸어다니는 포유동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동물은 1957년 독일에서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Bau und Leben der Rhinograndentia)이란 책이 출판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책의 저자는 하랄트 슈튐프케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책의 서문에서는 동물분류학 범주 가운데 동물계>척추동물문>포유강>코걸음쟁이목의 지위를 부여받은 코걸음쟁이류가 발견된 경위에 대해 쓰고 있다.

1941년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스웨덴 사람 스캠트비스트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표류하다 하이다다이피라는 섬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남태평양에 있는 하이아이아이군도에 있는 가장 큰 섬이었다. 이 섬의 남북 길이는 32km, 동서 폭은 16km에 달하는 규모로 높이 1752m에 달하는 활화산이 있었다 한다.

▲헥켈원시코쟁이. 아직 다리로 이동하는 단계이다.
▲헥켈원시코쟁이. 아직 다리로 이동하는
단계이다.

남태평양 섬에 살던 기이한 동물

스웨덴 병사 스캠트비스트에 의해 처음 이 섬이 알려지자 유럽의 학자들이 이 섬으로 몰려들었다. 모르겐슈테른(1871~1914 독일 시인)의 시에 나오는 ‘코로 걷는 동물’이 이 섬에서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폴리네시안 계통의 원주민 700여명도 살고 있었는데 유럽인들이 감기를 옮긴 탓에 모두 절멸하고 말았다 한다.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코걸음쟁이류의 일반적인 특징은 코의 생김새로 특징지어지는데
크게 코가 하나이거나(외코쟁이류) 코가 여러 개 있는 군(여러코쟁이류)으로 분류된다. 외코쟁이류에는 일반원시코쟁이류, 물렁코쟁이류, 느림보코쟁이류, 진흙코쟁이류, 땅코쟁이류, 다리코쟁이류, 뛰엄코쟁이류 등이 있으며, 여러코쟁이류에는 네코쟁이류, 여섯코쟁이류, 긴주둥이코쟁이류 등이 있다.

원시코쟁이를 제외한 코걸음쟁이류에서는 코를 이동수단으로 사용함에 따라 기존의 다리들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뒷다리는 대부분 퇴화되었으며, 나팔코쟁이들은 앞발을 소용돌이를 일으켜 먹이를 걸러먹는 데 이용하고 있다.

▲갑각꼬리달팽이코쟁이
▲갑각꼬리달팽이코쟁이

퇴화된 다리 대신 코가 이동수단

코걸음쟁이류는 다리가 퇴화된 반면 꼬리가 두드러진 역할을 맡고 있으며 다양하고도 별난 유형들이 있다. 코걸음쟁이류의 몸은 대부분 솜털과 강모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균일한 모양의 털로 되어 있다. 털이 없는 맨가죽 부위는 손, 발, 고리, 귀, 머리의 볏, 코이며 특히 코는 유난히 화려한 색을 띠고 있다. 책에 실린 수십 편의 칼라 세밀화를 통해 이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분류학적으로 목으로 분류된 만큼 코걸음쟁이류에는 아목, 절, 족, 속을 통틀어 모두 47종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헥켈코쟁이는 원시코쟁이과의 유일한 대표 종으로 다른 포유류들과 마찬가지로 네 발로 다니며 아직 충분히 진화되지 않은 코를 가지고 있다.

코쟁이들이 곤충을 잡으면 코를 땅에 박는 재빠른 곤두박질 동작으로 몸을 거꾸로 세운 다음 코의 가장자리를 빠르게 펼쳐 넓은 지면을 확보하는데, 이 때 끈끈한 콧물을 이용해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네 발을 사용하여 신속한 동작으로 먹이를 입으로 가져간다.

▲네코쟁이류의 대표종 모르겐슈테른나조벰
▲네코쟁이류의 대표종 모르겐슈테른나조벰

꽃머리잔코쟁이속에 속하는 코걸음쟁이류는 가장 아름다운 코걸음쟁이들이다. 이들은 짧고 넙적한 꽃잎 모양의 주둥이 주위에 뺑 둘러 나있는 여러 개의 코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코들은 곤충이 주둥이 주위에 내려앉게 되면 팽압을 이용해 코를 뻗어 포획한다. 이들은 꼬리를 이용해 꽃을 피우고 있는 식물들 사이에 서있으며 입으로는 강한 냄새를 풍겨 곤충을 유인하기도 한다.

원폭실험으로 가라앉은 하아이아이군도

이처럼 진기한 동물인 코걸음쟁이류가 살고 있던 남태평양의 하이아이아이군도는 원자폭탄 실험 때문에 평균해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책의 후기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게롤프 슈타이너 교수가 썼는데 그는 후기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던 도중 당시의 폭발이 군도로부터 200km나 떨어진 장소에서 유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지각장력에 의해 군도 전체가 평균해수면 아래로 가

▲멋쟁이꽃머리잔코쟁이. 꽃을 피운 식물들 틈에 서서 곤충들을 유인하고 있다.
▲멋쟁이꽃머리잔코쟁이.
꽃을 피운 식물들 틈에 서서
곤충들을 유인하고 있다.

라앉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당시 섬에는 ‘하이아이아이 다윈 연구소’가 있었으며 문제의 시점에 군도 연구를 위한 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던 중이었고, 책의 저자인 슈튐프케는 섬에서 코걸음쟁이류를 연구했으며 섬이 가라앉기 전 마지막 여행에서 코걸음쟁이류의 형태와 생활상을 담은 간략한 소개 내용을 집필한 것을 출판사에 넘기고 섬으로 돌아갔으며, 자신은 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는 문제로 저자인 슈튐프케를 만났다고 쓰고 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후기까지 읽은 후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를 챌 수 있을지 모른다. 하이아이아이군도 전체가 핵실험으로 물에 잠겼다는 내용도 믿어지지 않고, ‘하이아이아이’라는 말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았을 때 내지르는 영어라 한다. 2차세계대전 때 스위스와 함께 중립을 지킨 스웨덴 국적의 병사가 그것도 독일군이 아닌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는 설명도 그렇다. 진화론의 한 주장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따르면 사용하고 있는 기관이 더욱 진화하기 마련인데 코가 이동수단으로 진화한 데 대한 학술적 고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알고 소개까지 한 매체도 있다. 요즘 말로 보기좋게 ‘낚인’ 것이다. 1988년 창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의 ‘과학동아’에서는 신비한 실존 동물 컨셉으로 ‘비행류(鼻行類)’ 기사를 낸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기사화 한 것이다. 권위있는 전문잡지에 실렸으니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교재로 널리 채택

이 책은 게롤프 슈타이너(1908~2009) 교수가 상상력에 의존해 지어낸 이야기이다. 저자로 표기된 하랄트 슈튐프케는 물론 가공의 인물이다. 1962년 프랑스어판이 출간된 이후 미국, 일본 이탈리아에서 번역돼 출판됐으며 한국어판은 2011년 ‘북스힐’에서 나왔다.

저자 게롤프 슈타이너 박사의 상상력과 세밀화에 의해 ‘창작’된 픽션인 이 책은 특히 청소년들의 창의력을 자극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읽히고 있으며 동물 분류학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교재로 널리 채택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번역한 박자양씨는 독일 유학 중에 이 책을 처음 만났으며 책에 나오는 참고문헌을 도서관에서 직접 찾아보기로 하고 아무리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후기를 쓴 슈타이너 박사를 직접 만나보았다 한다. 박씨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슈타이너 박사는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키득키득 한참 동안을 웃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사실 참고문헌에 나오는 논문의 저자들도 라틴어에 해박하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박사가 지어낸 가공의 인물로 ‘주정뱅이, 난봉꾼, 멍청이 등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1946년 ‘코쟁이류 코의 해부학적 조직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비트브레인(Bitbrain)’이라는 학자의 이름은 ‘골빈 녀석’이라는 뜻이다.

일본어판처럼 ‘비행류’라 하지 않고 ‘코걸음쟁이류’라고 번역한 역자의 안목이 돋보인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숙명여자대학교 생명과학부 겸임교수를 역임한 박씨는 현재 판교면 등고리에 살고 있다. 뉴스서천의 칼럼위원으로 곧 독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허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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