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 특집
■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 특집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8.04.04 16:45
  • 호수 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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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선생 91주기…서천과 서울에서 추모 행사
​​​​​​​경기도 양주 외딴 곳에 묘소…“다시 고향에 모시자”



지난달 29일 월남 이상재 선생의 91주기를 맞아 한산 종지리 생가와 서울 YMCA 강당에서 각각 추모식이 열렸다. 서천의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서천군과 충남서부보훈지청이 후원한 91주기 월남 이상재 선생 추모제는 유승광 이사장의 추모사와 노박래 군수의 기념사,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추모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참석자들의 헌화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다함께 월남 이상재 찬가를 부르고 폐회했다.

서울YMCA와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회는 서울YMCA 조남국 이사의 추모기도, 김인복 서울YMCA 이사장의 추모사, 윤종오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의 추모사. 이상복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 대표회장의 추모사, 헌화, 월남 이상재 선생의 현손 이상구씨의 유족대표 인사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뉴스서천 취재팀은 서울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가했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있는 종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묘소를 둘러보았다.

 

▲한산 종지리 생가에서 열린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식
▲한산 종지리 생가에서 열린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식

 

▲서울 YMCA 강당에서 열린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회
▲서울 YMCA 강당에서 열린 월남 이상재 선생 91주기 추모회

월남 선생은 개벽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03년 감옥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특사로 풀려난 선생은 이 무렵 상동교회에서 전덕기를 비롯 이회영, 김구,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박용만 등을 비롯 많은 애국적 지식인들을 만났다. 또한 월남 선생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으며, YMCA 교육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13년에는 서울 YMCA 첫 한국인 총무가 되어 국권을 상실한 당시 현실에서 YMCA를 통해 인재 양성과 조선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이에 서울 YMCA에서는 월남 이상재 선생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

2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YMCA 2층 강당에서 서울YMCA와 월남 이상재 선생기념사업회 공동주최로 열린 추모회에는 2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장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단상에 놓여 있었고 강당 입구에는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와 한산이씨 종친회 등에서 보낸 화환이 있었다. 그 중에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보낸 화환이 눈에 띄었다.

서울 종묘 앞 월남 선생 동상

▲서울 종묘 앞 공원에 있는 월남 선생 동상
▲서울 종묘 앞 공원에 있는 월남 선생 동상

외세를 물리치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기미년의 함성이 울려퍼지던 서울 종로 3가 종묘 앞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서울YMCA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건립위원회가 1986410일에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비문 전면에는 윤보선(1897~1990) 전 대통령이 쓴 비문이, 후면에는 민족사학자 정인보가 쓴 글이 새겨져 있다.월남 선생 동상 배후에는 만민공동회에 참가한 민중들의 얼굴을 새긴 부조가 있다. 이곳에는 월남 선생의 발탁으로 조선일보에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해 올곧은 언론인의 길을 지킨 이관구(1898~1991)의 추모 글과 월탄 박종화의 추모글이 새겨져 있다.

이날 월남 선생 동상을 찾아 동상에 새긴 글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사진 촬영을 하는 시민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월남 선생 동상 뒤에 있는 만민공동회 부조
▲월남 선생 동상 뒤에 있는 만민공동회 부조
▲동상 전면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쓴 비문
▲동상 전면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쓴 비문
▲동상 후면에 있는 정인보가 쓴 비문
▲동상 후면에 있는 정인보가 쓴 비문


경기도 양주 월남 선생 묘역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월남 선생 묘역 위치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월남 선생 묘역 위치
▲월남 선생 묘역으로 가는 길 입구,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선생 묘역으로 가는 길 입구,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묘역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 글씨가 돌아서 있어 밖에서는 글씨를 볼 수 없다
▲묘역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 글씨가 돌아서 있어 밖에서는 글씨를 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던 월남 선생의 장례는 서울에서 열차로 군산까지 와서 뱃길로 강을 건너 길산천에서 다시 육로로 한산면 지현리 한산이씨 선영에 도착 안장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가 젊은 시절 스승으로 모셨던 월남 선생의 묘지 이전을 지시해 이해 19575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79번지 일원으로 천묘했다. 충남 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묘소가 생가가 있는 한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경기도 양주 땅에 묻히게 된 것이다.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추앙받고 있는 독립운동가 월남 선생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양주시의 공무원들도 잘 모른다. 묘소 마을 아래에 사는 주민들 일부만 월남 선생에 대해 알고 있다.

월남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구파발에서 일영 유원지 방면으로 39번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5분 정도 가면 삼하리가 나온다. 그러나 묘소 입구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이정표나 안내판도 없다. 한자로 월남이상재선생묘소입구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앞뒤가 돌아서 있어 도로변에서는 눈에 띌 수가 없다.

도로변 입구에서 묘소까지 1km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저수지가 나오고 바로 위에 묘역이 있다. 이 길은 노고산 등산로와 연결되는 길이다. 묘역 입구에는 정인보가 쓴 신도비가 서있다. 묘 아래로는 묘역을 관리하는 서울YMCA를 상징하는 역삼각형의 연못이 있다.

부인 강릉유씨와 합장한 묘에는 비석이 서있는데 전면에는 月南李商在之墓’(월남이상재지묘)라고 새겼다.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라 한다. 나머지 3면에는 변영로가 쓴 선생의 행장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일평생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죽는 날까지 청년의 마음으로 혁명의 길을 걸었던 월남 선생의 묘역은 너무나 쓸쓸해보였다. 이에 국립묘지가 아니면 고향 한산으로 다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정인보가 쓴 신도비.
▲묘역 입구에 있는 정인보가 쓴 신도비.
▲월남 선생 묘역.
▲월남 선생 묘역.

 

▲월남 이상재 선생 묘
▲월남 이상재 선생 묘
▲이승만이 쓴 글씨가 새겨진 비석
▲이승만이 쓴 글씨가 새겨진 비석

 

▲월남 선생 약력을 새긴 비석
▲월남 선생 약력을 새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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