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장한 죽음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이렇게 뿌리를 내렸다“
“당신의 장한 죽음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이렇게 뿌리를 내렸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8.04.25 17:13
  • 호수 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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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두 열사 순국 58주년 추모식 거행
19일 서천초등학교 교정 노희두 위령비 앞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나홍열 동문이 노희두 열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19일 서천초등학교 교정 노희두 위령비 앞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나홍열 동문이 노희두 열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서천동문회(회장 하창호)는 지난 19일 4.19혁명일을 맞이해 당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무장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 노희두 열사의 추모식을 거행했다.
노희두 열사의 위령비가 있는 서천초등학교 동쪽 교정에서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 6.13지방선거 민주당 예비 후보들 일부, 서천초등학교 6학년 5반 학생들과 나혜숙 교장·석순태 교감 선생님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노희두 열사는 당시 고교 교사이던 아버지 노종래와 어머니 전금녀의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천초등학교 37회, 서천중학교 7회, 장항농업고등학교 7회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3학년 재학 중 4.19를 맞았다.
1961년 4월 19일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학생들의 시위에서 경무대로 향하던 중 가장 먼저 경찰의 총탄에 맞아 약관 22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이날 나홍렬 동국대 후배 동문이 읽은 추모사에서 “그때 당신은 피끓는 청년대열의 선두에서  맨가슴으로 막아섰다”며 “당신이 있었기에, 당신의 용기가 있었기에, 당신의 장한 죽음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는 이렇게 드디어 뿌리를 내렸다”고 말했다.
노 열사의 추모식은 노 열사 순국 이후 1975년 이후 서천의 동국대학교 동문들이 매년 이어오고 있으며 유해는 서울 수유리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4.18혁명 최초 희생자 노희두 열사

노희두 열사는 4.19 혁명당시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고 있다. 다음은 동국대 4·19혁명유공계승자회 수석부회장인 김칠봉(2010년 당시 70세)씨의 증언이다.

“1960년 4월19일 오전 8시께 서울 중구 동국대 운동장. 동국대생들은 전날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당한 테러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당시 법학과 3학년이던 김씨는 강당과 강의실, 도서관을 돌며 “동국의 학우들이여, 공부가 머릿속에 들어옵니까?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운동장으로 집결합시다”라고 외치고 다니며 학생을 끌어모았다. 재학생 4천여명 가운데 1천명 이상이 모이자 선발대 600~700명은 오전 11시께 캠퍼스를 나왔다. 학생들이 을지로입구, 서울시청을 거쳐 국회의사당 주변을 지날 때 김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러 경무대로 가자”고 말했고 학생들은 ‘동국대학교’가 적힌 붉은색 바탕의 현수막을 들고 경무대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청 부근에서 경찰과 맞닥뜨린 시위대는 상수도관을 굴리며 저지선을 뚫으려 했고, 무장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사이 무장 경찰이 사격했고 김씨의 법학과 동기인 노희두가 총알을 맞았다. 동료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노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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