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한산모시 곡 헌정 소회
■모시장터-‘한산모시 곡 헌정 소회
  • 칼럼위원 석야 신웅순
  • 승인 2018.07.18 21:41
  • 호수 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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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 모시’ 15편은 1980년 경에 썼다. 어떤 사명감을 갖거나 목적 의식을 갖고 쓴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의 애련한 감정을 커서 언젠가는 풀어내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삼십세 쯤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 것이다. 이 때는 내 인생에서 주경야독해야했었던 가장 어려웠었던 때였었다. 먹고 사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었던 왜 하필 그 때에 이 작품이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시란 참으로 이상한 녀석이다. 좀 여유가 있을 때 나오면 대접 좀 받았을 텐데 먹을 것도 없는 가난할 때에 재주 없는 내게로 태어나 그만 흙 속에 묻히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서 35년이 흐른 내 교수 퇴임한 후에야 노래로 다시 태어났으니, ‘한산모시’도 덕이 없는 나를 만나 긴 인고의 팔자를 나와 함께 또한 견뎌내야만 했으니 운명이 기구하다면 기구하다할 것이다.   

 지금은 고향을 떠났지만 나는 서천에서 자라 서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다. 어렸을 때였다. 5, 60년대만 해도 서천 전역이 모시를 생업으로 해서 살아왔다. 우리 동네도 그랬고 나의 어머니도 그랬다. 모시 삼고 짜는 일이 삶 그 자체였다.
 달 밝은 밤 감꽃이 활짝 필 때면 이웃 움집에서 철컥철컥 베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꽃이 떨어지는 봄밤에도 빨갛게 홍시가 익어가는 달 밝은 가을밤에도 들려왔다. 나는 사랑방에서 늦게까지 공부했다. 자정이 넘으면 바로 옆에서 쏙독새 소리가 들려왔다. 처마 아래까지 내려와 괴성으로 울어댔다. 새소리가 어찌나 크고 무서웠던지. 자정이 넘어서도 소쩍새 소리는 아득히 들려왔고 겨울이면 부엉부엉 부엉새가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달빛이 문틈으로 들어오면 어린 나는 시인이 되었다. 한 많은 백제 여인이 금강물과 달빛으로 베를 짜는 것 같았다. 그러한 분위기는 훗날 나를 시인이 되게 만들었다.
                                                  - 신웅순의‘못부친 엽서 한 장’에서

  이러한 어렸을 때의 고향 모습이 먼 훗날 한산모시를 쓰게 했다. 
  사실 이 시조는 당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떨어진 작품이었다. 이후 나는 재주 없음을 알고 한 번도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면 대접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어떤 미련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고 느껴왔던 마치 백제 여인의 한이 서린 것 같은 그 서러운 모시 공정 과정을 시조로 읊어 그 한을 풀면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했다. 15편 중 1, 2, 3, 4편이 작곡이 되어 노래가 되었다. 

「한산모시」 헌정곡 

 

 이 헌정곡은 ‘한산모시, 바람을 입다’ 한산모시 베틀쇼의 첫 곡으로 시연되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곡 자체가 전통적이면서 민요풍 가락이 섞여있어 깊은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백제 여인의 한을 민족 고유의 가락으로 승화시킨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프라노에는 손주희, 피아노에는 조영웅, 첼로에는 최연선, 그리고 편곡과 지휘에는 권해경 선생님이 맡았다. 여기에 공금란 선생님의 가교 역할이 없었다면 이 곡은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졸필을 작곡해주신, 한산과 일면식도 없는 정태준 선생님께도 진정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군수 이하 축제 관련 서천 관계자 여러분들께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한곡이 탄생되기까지는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어렵게 탄생한 이 ‘한산모시’ 곡이 매년 공연 시작을 알리는 모시 축제의 시그널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테마곡 헌정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행사에 자신의 테마곡을 갖는다는 것은 그 행사의 자존심이 아니던가. 

연주와 노래 장면

  감회가 새롭다. 시조라는 명칭을 처음 쓰신 분이 조선 후기 시인 석북 신광수요, 한산 모시각의 ‘백저사’를 쓰신 분이 또한 그 후손인 선조 신영락이다. 그 후 후손인 무명 시인 필자가 ‘한산모시’ 곡을 헌정했으니 한산모시와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요, 또한 운명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왕에 발표되었으니 한산모시가 이 노래로 국내외로 널리 더욱 알려져서 내 고향 서천과 한산 모시가 국제적으로 위상이 더욱 높아졌으면 좋겠다. 
  몇 편 더 붙인다. 

     풍경 소리 어둠 밖을
     등잔불 이어가고

     한 올 한 올 숨을 뽑아
     무릎에 감는 슬기

     온 밤을 잉아에 걸고
     백마강물 짜아가네
                  -「한산모시 5」

     쩐지에 걸어 놓아
     잿불로 정을 말려

     한 필 한 필 삼경을
     숨소리에 포개놓고

     실밥에 맺히는 평생
     북 위에서 한을 푼다 
                -「한산모시6」

     이승을 헹궈내어
     풀밭에 너르면

     다림질 하는 햇살
     그리움은 마르는데

     흥건히 젖은 젖가슴
     신앙문도 잠그고
             -「한산모시12」

  이 시조가 시조 시인으로 등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조를 본 모 시인이 나를 만나 보고 싶어했다. 그 시인의 소개로 몇 년을 더 공부해 이태극 선생님의 2회 추천으로 80년대 중반에 시조로 데뷔할 수 있었다. 
  이 시조가 등단의 단초가 되었고 훗날 이 시조가 한산 모시의 테마곡이 되었으니 누가 이런 인연이 될 줄이나 생각했으랴. 세월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먼 훗날에 알려주는 점쟁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때를 만나지 못하고 물건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아무도 쓸 짝이 없는 것이다. 
  한산모시베틀쇼는 ‘한산모시’ 헌정곡을 필두로 막을 올려 서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 그리고 윤도현 밴드, 그리고 서천 필하모닉과 윤도현 밴드 협연으로 그날 밤의 휘날레를 장식했다.
  윤도현 밴드는 그야말로 화려했고 서천필하모닉은 그야말로 우아했다. 서천필하모닉이 모시옷이라면 윤도현 밴드는 패션쇼라고나 할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산모시짜기가 테마곡과 함께 전 세계에 널리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세월이 운명을 바꾸고 만남이 또한 운명을 바꾼다. 미래의 일은 다만 신만이 알고 있을 뿐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거기에 하나 더 보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좋은 날이 올 것이 아닌가 이런 소박한 생각을 해본다.
  장맛비가 잠깐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곤한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시원하게 소나기라도 쏟아져 한 세상의 미세 먼지들을 전부 씻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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