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영의 고전 산책 / 율곡처럼 찾아가서 퇴계처럼 공부하라
■송우영의 고전 산책 / 율곡처럼 찾아가서 퇴계처럼 공부하라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8.09.06 12:42
  • 호수 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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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戊午37155823세 율곡은 성주星州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우회하여 58세 지천명의 경지에 이른 중견 성리학자 퇴계를 찾아간다. 퇴계가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 초안을 쓸 무렵이고 <주자서절요> 집필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이다. 겸재 정선이 그렸다는 천원 권 지폐에 그려진 계상서당이 바로 그곳이다.

계상서당에 도착하자마자 봄에 예안禮安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이선생을 찾아뵙다라는 제하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상재하는데. 시내는 수사파에서 나누어졌고<계분수사파溪分洙泗派> / 봉우리는 무이산처럼 빼어났네<봉수무이산峯秀武夷山> / 살아가는 계획은 천 권쯤 되는 경전이고<활계경천권活計經千卷> / 거처하는 방편은 두어 칸 집뿐이로구나<생애옥수간生涯屋數間> / 마음은 제월보다 더 깨끗하고<금회개제월襟懷開霽月> / 말씀과 웃음은 광란을 안정시킨다<담소지광란談笑止狂瀾> / 소자는 도를 듣고 싶어 찾아왔지<소자구문도小子求聞道>

반나절이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비투반일한非偸半日閒> 퇴계선생은 율곡의 오언율시에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답한다. 나는 문 닫고 누워 봄이 온줄 몰랐는데<병아뢰간불견춘病我牢關不見春> / 그대가 와서 이야기하자 마음이 상쾌하구나<공래피활성심신公來披豁醒心神> / 이름난 선비 헛소문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건만<시지명하무허사始知名下無虛士> / 전부터 나는 몸가짐도 제대로 못한 것이 부끄럽다<감괴연전궐경신堪愧年前闕敬身> / 아름다운 곡식에는 강아지풀 용납할 수 없고<가곡막용제숙미嘉穀莫容稊熟美> / 갈고 닦은 거울에는 티끌도 침범할 수 없지<유진불허경마신遊塵不許鏡磨新> / 과정의 시어들은 모름지기 깎아버리고<과정시어수산거過情詩語須刪去> / 각자 공부하는 데 더욱 힘쓰세<노력공부각자친努力功夫各自親> 라는 경책警責의 시를 지어 답했다.

율곡 이이는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꽤 긴 시간 방황을 한다. 그 과정에 평생 오점을 낳는 승려가 된 사건이 발생했고 다시 환속해 노씨 문중의 로 맞이했으나 아내가 병약했다. 이러한 방황의 끝에 대학자를 찾아간 것이다. 퇴계 또한 율곡 이이의 이러한 방황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그야말로 훗날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할 수 있는 빼어난 인재가 저리도 방황을 하고 있으니 대학자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찾아가서 방황 좀 그만 하라며 말릴 수 없었던 것은 큰 그릇은 본래 시간이 많이 필요한 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불운의 세월을 거쳐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러 큰 사람은 큰 방황을 낳기도 한다. 더군다나 소학에 사무왕교지의師無往敎之矣라하여 스승은 찾아가서 가르치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율곡 이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퇴계를 찾아온 것이다. 퇴계는 하늘이 준 천재일우의 기회를 율곡 이이가 써준 시에 답시 형식을 빌어 통렬하고도 준열한 꾸짖음으로 가르침을 준다. 평생 문밖 스승을 모셔본 적이 없던 율곡 이이로서는 퇴계의 이러한 가르침에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친인 신사임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워왔던 율곡 이이는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 율곡의 인생에 있어서는 변곡점이 된 것이다. 이후 율곡은 방황을 끝내고 필생의 역작인 <성학십도>와 짝을 이루는 <성학집요>를 쓴다. 물론 이것은 훗날 얘기다. 이틀을 머물고 율곡이 떠나간 후  퇴계는 조 사경 목<趙士敬穆 사경은 . 목은 >에게 보낸 편지에 율곡을 평하길,

이 아무가 찾아왔는데 그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우며 지식과 견문도 많고 또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전성<前聖공자>의 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다. 그가 사장詞章을 너무 숭상한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었기에 조금 억제하려고 시를 짓지 말도록 했다. <과정의 시어들은 모름지기 깎아 버리고. 과정시어수산거過情詩語須刪去>”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를 일러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을 쓴 대목이다. 공자 이후 감히 누구도 함부로 쓸 수 없었던 문장이 후생가외다.  그것을 퇴계 이황이 율곡 이이를 향해 쓴 것이다. 퇴계 이황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 그만큼 정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의 지인지감법은 노론魯論에 근간을 둔다. 노론은 노나라에서 통용되던 각기 다른 판본의 세권의 논어 책인데 퇴계 이황은 이 책을 12-13세 딱 1년간 숙부 송재에게 배웠으며 또한 모조리 외웠다고 기록은 전한다. 나는 12세 때에<상언오십이세嘗言吾十二歲> 집밖을 나가지 아니하고<부월不越> 송재松齋 이우李堣 선생에게서 노론<논어>을 수학하여<수노론어송재선생受魯論於松齋先生> 13살이 되어서야 마쳤습니다.<십삼내필十三乃畢> 선생은 공부 과정을 엄격하게 세워<선생엄립과정先生嚴立課程> 조금의 여유로움조차도 못하게 했습니다.<불사유유不使悠悠> 1권을 마치면<일권기필一卷旣畢> 1권을 다 외웠고<이통송일권而通誦一卷> 2권을 마치면<이권기필二卷旣畢> 또한 2권을 다 외웠습니다/<이역통송이권而亦通誦二卷> 3, 4권을 읽을 때 즈음에는<독지삼사권讀至三四卷> 중간에 저절로 이해가 되어버리는 곳이 생겼습니다.<간유자통해처間有自通解處><退溪先生年譜補遺<上溪本> 卷一 退溪全書 27> 공부를 하려면 세상 것 끊고 율곡처럼 찾아가서 퇴계처럼 공부해야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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