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35) / 분홍방(粉紅榜)
■ 박일환의 낱말여행 (35) / 분홍방(粉紅榜)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2.23 11:21
  • 호수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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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계층의 자녀들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맹목적인 중화주의에 물든 중국의 청년 네티즌들을 샤오펀훙이라고 하는데,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소분홍(小粉紅)이다. 명칭에 분홍(粉紅)이 들어간 건 이들이 처음 등장해서 목소리를 내던 인터넷 웹사이트의 배경 화면 색깔에서 따왔다는 게 대체로 통용되는 견해다. 이들은 국수주의와 배타주의로 무장하고 인터넷상에서 조금이라도 중국의 이익에 반하는 시각을 보이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으면 막무가내로 공격을 퍼부어 21세기판 홍위병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모든 중국 청년들이 그런 건 아니고, 중국 내에서도 이들의 극단적인 행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는 있지만 샤오펀훙의 기세는 점점 거세질 뿐이다.

소분홍(小粉紅)이라고 하니까 그 말에 연상되어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분홍방(粉紅榜): <역사> 나이가 어린 권문 자제가 과거에 급제한 일을 놀림조로 이르던 말. 고려 우왕 11(1385)의 감시(監試)에서 시원(試員) 윤취(尹就)가 뽑은 99인 가운데 세가(勢家)의 아이들이 많았는데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입에서는 젖내가 날 정도였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이며, 홍분방(紅粉榜)이라 불리기도 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조선 시대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져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자손은 어린아이까지도 과거에 급제하던 일을 비웃어 이르던 말이라고 했으나 이런 식의 설명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조선 시대에 이 말이 자주 쓰이긴 했지만, 고려말에 혼탁해진 과거 제도의 폐습을 풍자하는 과정에서 생긴 말이라는 설명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 말이 역사책에 처음 등장한 건 <고려사>, 원문을 국역한 걸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우왕(禑王) 11(1385) 3월에 윤취(尹就)가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는데, 뽑은 자들이 모두 권세가의 젖내 나는 아이들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기롱하여 분홍방(粉紅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 아이들이 분홍색 옷 입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음서(蔭敍)라 하여 고려 시대에는 공신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들에게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벼슬자리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런 음서에 비해 형식적이나마 과거라도 치르도록 했으니, 분홍방이라는 말을 들은 권세가의 자제들은 얼마간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요즘 말로 하면 공정에 위배되는 행위인 건 분명하고, 그로 인한 폐해 또한 적지 않을 터였다. 상층부 집단 안에서도 권력을 독점하거나 앞서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과 암투가 있었으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신진사대부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기에 기존의 권력 집단에 대한 반발 움직임도 있었을 것이고. 분홍방 논란은 그런 상황 속에서 나온 셈이다.

새로 들어선 조선 왕조에서도 과거 시험의 폐단은 이어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행위가 이루어졌고, 그럴 때마다 신하들이 고려말의 분홍방 사례를 들어 과거 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간언하여 폐단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로 들어선 지금은 달라졌을까? 양상은 다를지라도 큰 틀에서 보면 차이가 없어 보인다. ‘부모 찬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른바 조국 사태로 불리는 사건을 통해 특권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하는지 극명하게 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저 굳건하고 오래된 성채를 무너뜨리는 일이 진정한 시민사회를 향해 가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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