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세계자연유산 한국 갯벌을 가다 (3)고창갯벌과 곰소만의 조기잡이
■ 기획 / 세계자연유산 한국 갯벌을 가다 (3)고창갯벌과 곰소만의 조기잡이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3.06.14 22:17
  • 호수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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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산과 변산 뚫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곰소만

조기떼 산란장으로 영광굴비 명성 낳은 고창갯벌
▲2021년 7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고창갯벌
▲2021년 7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고창갯벌

영광군 백수면 앞바다에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사산도, 오산도, 육산도, 칠산도의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이곳을 칠뫼라고 하는데 여기서 시작하여 법성포 앞바다를 거쳐 위도, 곰소만, 고군산군도에 이르는 해역을 칠산바다라 부른다. 이 해역에 형성된 어장을 칠산어장이라 하며 조기떼가 몰려들 때면 포구에 배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전국에서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던 곳이었다. 곰소만은 고창군과 부안군 변산반도로 둘러싸인 만이다. 20217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갯벌은 곰소만의 고창군 행정구역의 갯벌이며 면적은 55.31이다. 곰소만은 예로부터 조기잡이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곰소만과 인근 해역에서 이루어진 조기잡이에 대해 알아본다.

천혜의 입지조건

칠산바다 한 자락이 변산과 선운산 사이를 뚫고 내륙으로 쑥 들어와 크게 만을 이룬 것이 곰소만이다. 이곳은 천혜의 입지조건이 만든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이었다.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연평도에 비해 시장조건이 불리하여 대부분 염장가공되어 굴비라는 이름으로 줄포, 법성포 등지를 통하여 내륙으로 들어가 널리 판매되었으며 영광굴비라는 명성을 얻었다.

곰소만을 중심으로 조기잡이와 굴비 가공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4월 중순에서 5월 상순까지 이곳의 수온은 11~14도로 조기산란의 최적온도여서 산란을 위해 3, 4월에 흑산도를 거쳐 조기떼가 이곳으로 회유해 들어왔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이 육지에서 날라다 갯벌에 부려놓은 영양염류는 이들에게 풍부한 먹이가 되었다.

이들 밀려드는 조기떼를 대량으로 포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어살, 주목망 등 정치성 어구를 설치하는 데에 다량의 대나무가 필요했다. 고창, 변산 인근의 대나무와 싸리나무는 어살 등의 어구를 제작하는 데 충분한 재료를 대어주었다.

또한 옛날에는 냉동시설이 없었으므로 잡은 고기를 바로 절여 굴비로 가공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양의 소금이 있어야 했으며 선운산과 변산의 소나무는 소금을 굽는 데 필요한 장작을 대어주었다.

▲곰소만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1톤짜리 무동력선. 부안군 진서면 구진마를 박물관
▲곰소만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1톤짜리 무동력선. 부안군 진서면 구진마를 박물관

또한 곰소만에는 갯골이 발달해 있어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닐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조기잡이에 유리한 역할을 했으며, 이 갯골을 따라 포구가 발달했다. 이처럼 곰소만은 일시적으로 밀려오는 조기떼를 짧은 기간 동안에 잡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어전어업

神箭打魚 신전타어

孰編山木包江渚 누가 산 나무 엮어 강물 둘렀는가
潮退群鱗一漁 조수 빠지자 많은 물고기 한꺼번에 잡히네
却笑陶朱勞水畜 비웃노라! 도주공의 물고기 기르는 수고를
坐敎滄海自驅魚 앉아 있으면 창해가 자연히 고기 몰아오네

(도주공(陶朱公) : 춘추시대 월왕 구천의 신하 범려. 그는 벼슬을 그만 두고 도() 땅에 가서 주공이라 변성명하고 큰 부자가 되었으므로 도주공이라 불렀다. 그 뒤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도주공에 비긴다.)

위 칠언율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이 부안 사람 동상 허진동의 우반십경(愚磻十景)’에 붙여 지은 시이다.

어살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울타리처럼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함정이다.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 때 이 울타리 안에 갇힌다. 요즘처럼 어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주로 연근해 어장에서 어업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어찌 보면 원시적이랄 수 있는 이 어살이야말로 조수를 따라 회유해 들어오는 고기떼를 일시에 다량으로 포획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어로방법 중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좋은 목에 있는 어살은 못자리하고도 안 바꾼다는 옛말이 있다.

▲나일론망으로 대체된 어살
▲나일론망으로 대체된 어살

이러한 형태를 어전(漁箭) 어업이라고 하는데 곰소만은 수심이 얕은데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어살 목으로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전국에서도 이곳의 어살 규모가 가장 컸었고, 해세(海稅)의 납입도 가장 많았다.

조기는 제주도 남쪽의 따뜻한 바다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면 이동하는데, 살구꽃이 봉오리를 터뜨릴 무렵이면 어김없이 칠산바다로 몰려왔다가 살구꽃이 질 무렵 연평도를 향해 칠산바다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가을이면 월동을 위해 다시 제주도 남쪽 바다로 내려간다. 그 길목에 위치한 칠산바다는 최적의 조기 산란장으로 이 시기에는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은 조기떼가 몰려들었다. 부안군 보안면 사람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기 울음소리에 잠을 설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봄과 가을에 몰려드는 조기떼를 잡기 위해서는 어살도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설치해야 했다. 겨울동안 준비하여 2월경에 설치한 어살에서는 봄조기를,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찬 기운이 들기 시작하는 8월에 설치한 어살에서는 가을조기를 잡아 올렸다. 어살을 설치하려면 어살목(주로 참나무 류가 쓰였다)과 대나무의 조달이 원활해야 하는데 부안은 나라의 재목창이라 할 수 있는 울울창창한 변산이 있고, 대나무가 자랄 수 있는 따뜻한 지방이어서 이 또한 어살 운용에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에서 바라본 곰소만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에서 바라본 곰소만

어살 제작용 대나무는 멀리 장성, 담양 등지에서 조달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장성, 담양 등지의 집안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전어업은 조선말기에 이르러 어족자원이 차츰 줄어들면서 갯골 중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갯골 중앙에 주목망을 설치하고 꽁댕이배라는 작은 무동력선을 이용하는 형태로 발전하다가 중선망 어업에 밀리기 시작했다. 망어업은 처음에는 면망에 송진이나 감물을 들여 사용하다 나일론망이 등장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망어업이 보편화되자 어전어업은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칠산어장의 중심 위도

위도는 고려조 이래 부안군에 속했으나 1896년에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나눌 당시 고군산군도와 함께 전남 지도(智島)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고군산군도는 옥구군으로, 위도는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6311일 시행한 행정구역 개편에서 전라북도의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편입되고 위도는 다시 부안군으로 편입되었다.

칠산어장의 중심에 놓여 있는 위도 근해에서는 조기를 비롯하여 홍어, 병어, 회문어, 전어, 가오리, 갯장어, 삼치, 박대, 서대, 장대, 새우, 등뼈가 있는 오징어, 갈치 등 각종 생선이 잡히고 대구와 청어도 잡혔다.

특히 조기가 많이 잡히는 3월에서 6월까지 파시가 들어서면 파장금 맞은 편에 있는 식도에까지 칠팔백 척의 고깃배가 빽빽히 들어서 닻을 내려 밤이 되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위도 치도리에 몰려든 조기잡이 배. 1960년도
▲위도 치도리에 몰려든 조기잡이 배. 1960년도

파장금항에서는 고기를 매매하는 시장이 섰다. 이를 파시라 하는데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의 하나였다. 파시가 들어서면 석유, 장작, 발동기, 각종 어구, 식량, 부식물, 각종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들어오고 요리집, 다방, 여관, 선술집, 이발관, 미용실, 도박장, 떡집 등이 빈터만 있으면 들어서 이십여 호 남짓하던 파장금 마을은 수백 가호가 들어서 수천 명이 북적거리는 중도시로 변했다.

나일론망이 등장하며 이처럼 대량으로 조기를 포획하자 어족자원이 차츰 줄어들게 되고 조기잡이는 차츰 먼 바다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칠산바다로 산란을 위해 회유해 들어오는 조기떼는 거의 사라졌다. 위도의 파시는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의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또한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막은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유속이 느려지고 칠산바다 전역에 뻘이 쌓이며 칠산어장은 날로 황폐해지고 있다.

조기의 가공

곰소만 일대에서 잡은 조기는 냉동시설이이나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선어(鮮魚)로 소비지까지 운반될 수 없었기 때문에 굴비라는 이름으로 염장가공되어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굴비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정주(靜州:지금의 영광군)땅은 법성포 모래벌판과, 그 강산의 수려함으로 예로부터 소동정호(小洞庭湖)라 불리었다. 이곳에서 고려 시대에 이자겸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이른 봄부터 이곳 저곳의 포구에서 어선들이 줄을 지어 돛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정주땅에서는 이른 봄부터 조기잡이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칠산바다에서 조기는 너무 많이 잡혀서 처치 곤란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남은 고기를 아무렇게나 소금에 간했다가 모래바닥이나 바위에 널어 물기를 뺀 후 말려놓았다. 그리고 갈무리해두었다가 1년 내내 먹었는데 그 맛이 아주 좋았다. 이자겸은 이런 좋은 맛을 왜 여태 모르고 개경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석수어라 해서 진공해온 것을 먹어보긴 했으나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자겸은 한 생각을 떠올렸다.

'정주굴비(靜州屈非)'

이 네 글자를 건석수어에 써서 임금에게 진상했다. 정쟁에 밀려 비록 이곳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결코 굴하거나 꺾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담아 보냈던 것이다. 이를 맛본 임금 인종은 '이것이 정주 굴비인가' 했을 뿐이었다.

이자겸의 '정주굴비'의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인종은 정주굴비를 해마다 보내라고 진상품목에 추가시켰다. 이후 정주는 지명이 영광으로 바뀌고 영광굴비는 멀리 원나라에까지 진상되어 왕후장상들의 입맛없는 한여름의 반찬으로 빠지지 않았다 한다.

굴비는 민족의 지혜가 담긴 우리 고유의 생선 가공품이다. 그 방법에는 염수법과 살염법이 있다. 염수법은 조기를 포화식염수에 7-10일간 담가 염분이 충분히 배어들게 한 다음 건져내어 해풍에 말리는 방법이다. 소금물에 담겨있는 동안 공기와 닿지 않기 때문에 산패(酸敗)를 막을 수 있고 색깔도 좋은 잇점이 있지만 소금의 소비가 많으며 큰 항아리 등이 필요하다.

살염법은 조기에 소금을 직접 뿌려 1개월 정도 용기에 담아두는 방법이다. 소금에 절일 때 공기에 닿아 품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소금이 크게 절약되고 건조시간을 단축시켜 대량의 조기를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비생산이 가능했던 데에는 무엇보다도 곰소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전오염(煎熬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칠산어장에서는 조기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동지나해상에서 잡은 조기가 4-5월경 법성포나 곰소 등지에 반입되어 가공 판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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