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농민군 나방환은 알고 있다
동학혁명농민군 나방환은 알고 있다
  • 유승광 / 서천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
  • 승인 2023.06.29 04:14
  • 호수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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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 동학농민혁명의 기지 공덕산을 지키자
▲동학농민혁명의 기지 공덕산 정상
▲동학농민혁명의 기지 공덕산 정상

농민군, 한산읍성 이어 서천읍성 점령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고부 땅 녹두장군 전봉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19세기 조선의 반봉건, 반외세를 척결하고자 일어났다.

서천지역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1887년이다. 동학 접주로는 서천의 추용성, 한산의 김약선, 비인의 최재홍이 활동하였으며 도접주는 종천면 도만리의 조영구이다.

18941112일 한산읍성이 점령되었고, 20일에는 서천읍성이 점령된다. 이때 한산읍성을 점령한 후 동학 농민군은 화양산을 점령하고, 서천읍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길산천에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이때 두문 5(내동, 내남, 외남, 두북, 계촌)이 불에 탔다. 지금도 내동 고란말에는 동학때 불탄 기와들이 남아 있다. 또 내동에는 동학 때 불탄 마을을 재떼밭머리라고 부르고 있다. 재떼밭머리는 동학농민군에 의하여 마을이 불에 타 재가 많은 밭머리라 부른다.

길산천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서천읍성 동문을 통하여 진입한 다음 읍성을 점령한다. 당시 서천군수 유기남은 '이 군보다 더 추운 군이 또 있으랴'로 당시 서천의 열악한 모습을 표현했다.

길산천 타고 내려와 공덕산 점령

화양산을 점령한 농민군은 신포리 공덕산과 봉화를 주고받으며 전투 상황을 공유했다. 길산천을 타고 공덕나루를 통해 공덕산을 점령한 농민군은 공덕나루 주막에서 숙식도 하고 회의도 했다.

또 화양산을 바라보는 제1봉에 진을 치고 유기그릇으로 밥을 해 먹었다. 그래서 공덕마을 어떤 집인가에 유기그릇이 많았다는 금당리 사람들의 구술도 있다.

1894년을 즈음하여 서천지역에서 불려진 <파랑새 노래>가 구전되고 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솔잎댓잎 푸릇푸릇
하절인 줄로
생각하고 나왔더니
하절은 다 지나가고
동지섣달 설한풍인데
저건너 푸릇나무
나를 속이었다

이 노래는 2008년 나방환 씨가 채록한 것이다. 서천지역 역시 파랑새 노래가 남아 전할 정도로 동학농민혁명과 아주 밀접한 곳이다.

동학혁명에 참여한 신포리 사람 나방환

1894년 서천지역에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계층과 지역에 대해서 종천 도만리 고 조해연 씨는 증언했다. 서천지역의 해안에 살고 있는 어민들은 대부분 참여하였으며 특히 신포리 사람들도 많이 참여하였다고.

이때 신포리의 대표적인 동학농민군은 나방환이다. 나방환은 2008520일 국가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인정되어 447호로 등록되었다.

나방환의 본적은 서천군 마서면 신포리 393번지이다. 현재 신포리에 살고 있는 유명 후손으로는 나학균 전 서천군의회 의장이 있다. 나방환은 나학균 의장의 고조부가 된다. 장손 고 나해균은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이사로 활동하다 세상을 떴다.

나방환의 활동 등록지에 보면 나방환은 1838년 생으로 189446일 황토현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나방환은 57세였고, 아들 나효집은 36, 손자 나성섭은 13세였다. 나방환은 살림을 젊은 아들에게 맡기고 농민으로서 동학에 심취하여 활동을 하였다.

황토현에서 관군과 싸우다 순국

정읍 황토현전투에 참가하기 전에는 나방환은 전답을 모아 마을에서 제일 잘 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한학을 배운 순수 농민이었으며, 지금도 나학균 의장네 집에는 고서들이 다수 남아 있다. 그이후 후손들이 꾸준히 공부한 서적일 것이다.

나방환은 황토현으로 떠나기 전에도 서천지역 신포리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다

189446일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은 관군과 싸워 최초의 승전고를 울렸다. 이때 많은 농민군들이 전사하였는데 서천지역에서 적극 활동하다 정읍 황토현으로 이동한 나방환도 전사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장렬히 목숨을 바친 것이다.

나방환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자손들은 시신을 찾으러 두 차례나 방문하여 누워 있는 많은 주검들을 살펴보았으나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무토막을 이용하여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그후 부인 평산신씨가 13년 뒤에 돌아가셔서 합장하였다.

지금은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추모관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학혁명의 기지 공덕산

신포리 사람 나방환은 189419세기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진상을 알고 있다. 신포리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가 왜 동학 농민혁명에 가담했는가?

가까운 마서면 계동리 동죽마을에 전운사 조필영이 살았다. 전운사 조필영은 삼도 동학농민혁명의 피를 끓게 한 원흉이다. 조필영은 전라, 경상에서 거둔 세금을 마포창까지 싣고 간 다음 쌀이 다 썩었다고 다시 세금을 내라 하였다. 그는 썩을 대로 썩은 부패 관료의 상징이었다. 조필영의 아들은 남포현감과 옥구현감을 지낸 조병징이다. 조병징의 묘가 마서면 계동리 계룡마을 입구에 있다.

이런 사실을 옆동네 나방환은 몰랐을까? 나방환은 썩어빠진 19세기 조선 정부를 개혁하고 밀려오는 일본을 물리치고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지금 202321세기 대한민국은 또 어떠한가? 이 나라를 제대로 지켜야 한다. 아니 동학농민혁명의 기지 공덕산부터 제대로 지켜야 한다. 그래야 신포사람 동학혁명농민군 나방환 님께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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