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에 생각하는 서천의 독립운동가 -정원득, 고석주
■ 광복절에 생각하는 서천의 독립운동가 -정원득, 고석주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3.08.17 08:00
  • 호수 11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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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광복은 미국의 승전이 가져온 결과물인 양 알고 있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해본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 우리 민족처럼 지배국을 향해 단 하루도 총성이 멈추지 않았던 나라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다. 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권회복을 위해 떨쳐 일어섰던 서천 사람 두 분을 살펴본다.

조선총독부·경성부청 등 동시폭파 기도한
종천면 지석리 사람 정원득

조선총독부·경성부청·조선신궁·조선은행·종로경찰서등은 악명높은 일제의 조선 지배 주요 기관이었다. 이들 5개의 기관을 동시에 폭파하려는 시고가 19261월에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 중심 인물은 서천사람 정원득이었다. 그는 1896년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나이 서른 무렵인 1925년 흥림저수지가 착공됐다. 정원득은 흥림저수지 축조 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을 폭파하는 역할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창의단 사건 재판 결과를 보도한 1927년 6월 18일자 매일신보
▲창의단 사건 재판 결과를 보도한 1927년 6월 18일자 매일신보

19259월 어느날 청주에 사는 그의 손위 처남인 김응선이 찾아왔다. 김응선(1883~1944)은 충북 옥천군 이남면 강청리에 살고 있었으며 그의 동지인 동향의 전좌한(1899~1986)과 함께 창의단 단원으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창의단(倡義團)1919년 이범윤(李範允)의 부하인 이범모(李範模)가 조직한 항일무력투쟁 단체로 러시아, 북만주, 연해주, 함경북도 무산 일대를 세력권으로 하고 있었으며 1000여명의 단원이 있었다. 단장에 이범모, 역원(役員)에 김내언·강두황·박인섭 등이 임명되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고, 첫 해 11월 당시 모금된 액수는 3150()이었다 한다.

김응선과 전좌한은 창의단의 거사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동시에 폭파하기로 하고 방법을 찾던 중 매제인 정원득을 찾아온 것이다. 매제인 정원득이 공사장에서 발파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고 다이너마이트를 빼돌리기 위함이었다.

정원득은 김응선의 뜻에 따라 발파작업이 있는 날이면 몰래 다이나마이트를 빼돌렸다. 다이너마이트 10, 뇌관 10, 도화선 15척이 확보됐다.

김응선은 전좌한의 집 골방에서 폭탄 6개를 제작 완료하고 옥천군 이원면과 금산군의 경계에 있는 진위산 속에서 폭발 실험을 했다.

창의단은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목표로 정했다. 폭파에 가담할 단원들이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오기 어려우므로 국내에서 이를 확보키로 했다. 이들은 경성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일, 거사에 가담할 단원의 확보 등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한편 김응선은 같은 마을에 사는 송암우, 정명옥, 김운용 등을 경성 구경을 시켜준다고 포섭해 128일 옥천 이원역을 출발해 그날 밤 용산역에 도착했다.

다음날 시내구경을 시켜준다며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실지로 답사하고 청진동 여관에 투숙했다. 이튿날 또다시 폭파 장소를 재확인한 뒤 광화문 중국요리점에서 최후의 기념 회식을 마친 후 일행에게 계획을 말했다. 거사일을 다음날인 131일 새벽으로 정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어 일제 헌병대가 이들의 숙소를 급습했다. 송암우, 김운용, 정명옥 등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창의단 사건 재판 기록
▲창의단 사건 재판 기록

서천 사람 정원득과 그의 처남 김응선은 다시 서울의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 봉천으로 건너가 창의단 조직을 재건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19267월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됐다. 정원득은 징역 4, 김응선은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김응선은 애국장을, 정원득은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후손이나 친척들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와이에서-군산에서-판교에서 열정 불태운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

▲고석주 선생과 부인 나운금 여사
▲고석주 선생과 부인 나운금 여사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은 1864년 충남 논산 태생으로 1903125일 홀로 하와이로 건너가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과 같이 하와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에서 자강회, 협성회, 국민회 등의 조직에 관여했고 기관지인 자강회 월보와 신한국보 등 신문의 집필활동을 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한인기숙학교 교사와 하와이 노동자 대표로 교민의 단결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6년 귀국하여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중 1919년 군산 3.5만세운동을 주도한 협의로 1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2910월에는 판교교회 설립에 참여했고 193010월 서천군 동면(현 판교면) 판교리 473-2번지로 호적을 옮겼다.

이후 판교에서 교회 중심의 사역과 계몽운동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했고, 야학활동과 청년회 등을 조직해 민족의식을 키우는 활동을 전개하다 1937719일 소천해 판교면 복대리 산27번지에 안장됐다.

고석주 선생이 55세이던 19193.5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에 대해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공훈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19년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이 해 31일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가 동료 교원에게 전해지면서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기도 하고, 각 방면으로 연락해 군산(群山) 장날인 36일에 거사하기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거사 전날 이 운동계획이 발각되어 주동교사들이 연행됨으로써 35일 군산에서 학생과 주민, 예수교 신도 등 500여명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학생들에 의하여 태극기가 나누어지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한편 군중의 일부는 경찰서로 달려가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 군경은 주동인물들의 검속과 군중해산에 주력해 영명학교 및 예배당을 수색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영명학교에서 선언서 200여장이 발견됨에 따라 송정헌(宋正憲), 양성도(梁成道)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3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4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6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6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2018년 판교면 현암리 판교교회 앞에 세운운 고석주 선생 흉상
▲2018년 판교면 현암리 판교교회 앞에 세운운 고석주 선생 흉상

출감 후 선생은 군산구암교회 장로에 임직되어 활동하다 1930년에 서천 판교를 근거지로 애국계몽운동과 민족운동 고취에 진력했다.

2017112일 파묘 후 화장을 거쳐 판교교회 대예배실에서 안장 추념식을 갖고 이날 오후 3시경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겨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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