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58) / 복복장자(福福長者)
■ 박일환의 낱말여행 (58) / 복복장자(福福長者)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8.24 09:18
  • 호수 11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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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를 가리키는 일본식 조어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성경 말씀에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으나 열성 신도 중에도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20여 년 전에 한 카드 회사가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를 선보인 뒤 너도나도 따라 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자체를 탓할 수는 없으나 부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다시피 한 현실을 바람직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부자를 뜻하는 말 중에서 정체가 이상한 낱말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복복장자(福福長者): 매우 행복한 부자(富者).

() 자가 두 개나 들어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부자를 뜻하는 말로 우리는 예전에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말을 썼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비롯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근대 이후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백만장자나 억만장자라는 말이 들어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백만장자(百萬長者)는 서양 사람들이 백만 달러 정도의 자산을 가진 이를 뜻하던 ‘millionaire’를 번역한 말이며, 1719년에 미국의 금융가 스티븐 펜티먼이 처음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 후 화폐 가치의 변화에 따라 천만장자를 거쳐 억만장자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용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쓰임새가 거의 없는 복복장자라는 말은 언제 누가 만들어 쓰던 말일까? 중국이나 일본 사이트를 뒤져 봐도 이 낱말이 사용된 걸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일본어사전에 대복장자(大福長者)와 만복장자(萬福長者)가 표제어에 있고, 사전에는 안 보이지만 미복장자(米福長者), 자복장자(子福長者) 같은 말들이 쓰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복장자는 우리말의 천석꾼이나 만석꾼에 해당할 법하고, 자복장자는 자식을 많이 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 자복장자가 쓰인 적은 있으나 다른 낱말은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장자(長者)라는 한자어는 우리도 큰 부자라는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복복(福福)이 표제어에 없지만 일본어사전에는 독립된 표제어로 올린 다음 부유하다는 뜻을 가진 낱말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복()을 두 번 겹쳐 쓰는 대신 다복(多福)이라는 한자어를 만들어 썼다.

짐작건대 복복장자(福福長者)라는 말은 누군가 일본식 용법을 빌려서 만든 말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그치면 좋겠으나 국립국어원이 만들어 운영하는 <우리말샘>에 다른 낱말 하나가 더 있는 걸 발견했다.

금만가(金滿家): 큰 부자.

금이 꽉 차 있다니 부자라는 뜻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들어본 이들이 많지 않을 것 같은 낱말이다. 이번에도 옛 신문 기사를 살펴보니 저 낱말이 제법 눈에 띄었다. 이 낱말 역시 일본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요즘에는 이 말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가져다 쓰더라도 우리 한자어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어사전에 싣더라도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는 걸 밝혀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 부유함을 상징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자 중에 을 세 개 합쳐 만든 이라는 글자가 있다. ‘기쁠 흠자인데, 중국에서는 가게나 회사 이름에 저 글자를 많이 사용한다. 금덩어리가 마구 굴러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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