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신광하의 「성시전도 城市全圖」(최초 공개)
■ 기고 / 신광하의 「성시전도 城市全圖」(최초 공개)
  • 신웅순/중부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8.24 14:22
  • 호수 11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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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자연경관과 도시경관을 읊은 장편의 칠언고시

서천사람 신광하, 정조의 명으로 지은 ‘성시전도시’ 장원

 

 

1792(정조 16) 424일 정조 임금은 내궐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압운으로 시를 지어 3일 후에 제출하도록 명했다. ‘성시(城市)’는 성으로 둘러싸인 시가지, 즉 한양성이다. 따라서 성시전도시에서는 18세기 한양의 자연경관과 도시경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임금 정조는 신하들이 지어올린 성시전도시들을 직접 심사했는데 여기에서 서천사람 진택 신광하(석북 신광수의 동생)가 장원을 했다. 지난 78일 고령신씨 문중에서 여러 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신광하의 성시전도시를 최초 공개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신웅순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초시 장원한 신광하의 「성시전도」 칠언백운고시 원본
▲초시 장원한 신광하의 「성시전도」 칠언백운고시 원본
▲초시 장원한 신광하의 「성시전도」 칠언백운고시 원본
▲초시 장원한 신광하의 「성시전도」 칠언백운고시 원본

202378일 고령신씨 종친 회장 사무실에서 서천군 문화체육과 직원과 한문학자, 향토학자, 종친들과 함께 석북 신광수 일가의 유묵자료 공개 행사가 있었다. 신광하의 성시전도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성시전도 연구자이신 안대회 교수님은 국보급 유물, 성시전도의 사료적,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현장에서 설명해주셨다.

성시(城市)는 성으로 둘러싸인 시가, 당시 한양을 말한다.

내각일력은 규장각의 업무일지이다. 1792(정조 16) 424일 기사의 기록이다.

정조가 내각의 각신을 비롯한 검서관, 초계문신 등에게 문체는 칠언백운고시’, ‘시제는 성시전도(城市全圖)’, 압운 ()’로 정하여 짓도록 명하고 3일의 기한을 주었다. 그리고 3일 후 427일 정조는 신하들이 제진한 성시전도시에 대하여 고과의 평을 하였다.
    (
박현욱, 성시전도로 읽는 18세기 서울,11쪽 재인용)

소리가 있는 그림과 같다는 정조의 평

성시전도시성시전도를 시제로 하여 1792년 정조가 내궐 당직 신하들로 하여금 지어 올리라고 한, 18세기 한양의 자연경관과 도시경관을 읊은 장편의 칠언백운고시이다.

지금까지 성시전도시는 이덕무, 박제가, 신광하, 서유구, 이만수, 유득공, 신택권, 이학규, 신관호, 정동간, 이희갑, 김희순, 이집두 등 모두 13인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성시전도(城市全圖)는 다르다. 하나는 시이고 하나는 그림이다. 여기에서의 성시전도는 각자가 생각하는 당시 서울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 성시전도에 대한 시이지 그림 성시전도가 아니다. 물론 성시전도를 보고 지은 화제시도 아니다. 성시전도그림은 이후 4년이 지난 1796년에 와서야 시도되었다. 이 때 화원들은 4년 전에 지은 한양을 떠올리며 지은 성시전도시를 근거로 삼아 성시전도를 그렸을 것이라 생각된다.(박현욱, 위의 책 머리말에서) 후에 그린 성시전도는 말하자면 시의 뜻을 주제로 한 그림, 시의도(詩意圖)이다.

신광하(申光河,1729-1796)1792년 임금님의 성시전도시제 시험에서 이하일二下一의 점수로 거수 居首’, 칠언 백운고시 초시에 장원을 했다. 정조 임금은 유성화 有聲畵’ ‘소리가 있는 그림 같다고 평하신 다음 직접 3글자를 쓰시고 二下一붉은 글씨로 점수를 매겼다. 붉은 글씨와 비점들은 정조의 필적들이다.

신광하는 이 고장 서천 출신 석북 신광수의 둘째 아우이다. 자는 문초이고 호는 진택이다. 1751(영조 27)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778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1783년 백두산에 올라 산제를 지냈다. 179163세에 대과 어제(御題) 어고(御考)에 급제한 후 재시 어고에서도 급제 장원했으며 이듬해 정조가 시제를 낸 성시전도(城市全圖)에서도 장원의 영예를 얻었다. 우승지, 공조참의, 좌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나 2천여수의 시를 남겼다. 당시 시문으로 유명한 여와 목만중간옹 이현경해좌 정범조 등과 함께 세인들은 여간해택 4문장이라 일컬었다.

역사성과 의고성이 강한 작품으로 평가

1792424일 성시전도시의 제진(製進)에 몇 명이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조의 고과평을 보면 1등은 병조정랑 신광하, 2등은 검서관 박제가,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이며, 승지 윤필병, 겸검서관 이덕무유득공은 삼상(三上)으로 공동 4등을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1등에서 4등까지 6편의 시에 대해서는 직접 평을 하였는데 1등을 한 신광하의 시권에 대해서는 소리가 있는 그림 같다(有聲畵)’, 2등 박제가의 시권은 말을 알아듣는 그림 같다(解語畵). 3등 이만수 시권에 대해서는 시권이 좋다(試券哿), 4등 윤필병의 시권에 대해서는 넉넉하다()’, 이덕무의 시권에 대해서는 아취가 있다()’, 유득공의 시권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림 같다(都是畵)’고 평하였다.(박현욱,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15.)

신광하의 성시전도시는 역사성과 의고성이 강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반적으로 도성의 모습을 화려하고도 장중하게 묘사, 태평성대를 찬양하였다.

장엄하구나 성시전도여
장안과 낙양 어디와 닮았나(박현욱역)

이렇게 성시전도 1, 2구는 시작된다. 장안과 낙양을 비롯 임치, 변경, 금릉 등 유서 깊은 중국의 역대 도읍들과 견주거나 오위,태을,구진,영실,천시,추자,동벽 등 하늘의 별자리에 비유하여 한양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경회루 앞에 육조가 줄지어 있고
광화문 밖에는 시전이 늘어서 있네
왼쪽 종묘 오른쪽 화려한 집은 얼마나 모여 있는가.
운종가 큰 길은 남북과 곧바로 연결되고
가운데 열린 황도는 숫돌처럼 평탄하네

태을과 구진 엄숙한 오영이요
(박현욱역)

49 - 55구의 시이다. 경회루, 육조, 광화문, 종묘, 사직단, 운종가 등 당시의 도시경관을 화려하게 읊었다. 황도는 해와 달이 다니는 길로 임금이 다니는 대로를 말한다. 태을은 북극성으로 궁궐을 상징하고 구진은 장군과 삼공을 맡은 별로 오영인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궁궐, 관아, 군영 등 도성의 주요 시설들을 별자리로 비유해 그 위상을 높였다.

또한 태조의 용비어천가와 왕조 창업, 세종의 예악과 문물, 선조의 임진왜란 물리침, 영정조의 치세와 태평성대 등 역대 임금의 치적과 덕을 찬양, 중국의 주한나라, 우임금, 삼황 등과 비교하며 조선의 권위와 역대 왕들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18시가 서울 모습 담긴 귀중한 자료

그림이여 그림이여 한양 그림이여
천년만년 온전히 저와만 같아라
소신 삼가 전도편을 완성하여 절하여 올리나이다
궁궐에 성군이 계시니 자손 또한 성스럽네

(박현욱역)

197-200, 성시전도의 끝부분이다. 한양의 그림이여 저와만 같아라 하면서 궁궐에 성군이 계시니 자손 또한 성스럽다고 찬양, 천년만년 태평성대의 기원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성시전도시는 18세기의 당시의 서울의 자연과 도시 경관, 도시사, 사회사, 생활사, 회화사 등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고 무엇을 담고자 했는지 추측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자료공개의 도움을 주신 신홍순 종친회장, 서천군 문화예술 관계자 여러분, 안대회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박현욱의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을 참조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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