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61) / 등거리
■ 박일환의 낱말여행 (61) / 등거리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9.14 11:13
  • 호수 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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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걸치는 여름옷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여름철에 여성들이 주로 입는 소매가 없는 윗옷을 소데나시, 줄여서 나시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소데는 소매, 나시는 없다는 뜻을 지닌 일본말이다. 그러다 일본말을 순화하면서 민소매라는 말로 바꾸었으며, 지금은 나시보다 민소매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소데나시 말고 한소데라고 부르던 것도 있었는데, 지금의 반소매 즉 티셔츠 종류를 가리키던 일본말이다.

여성들이 소매 없는 옷을 입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여성들이 팔이 다 드러나는 민소매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 192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이른바 모던 걸들 중에서 일부가 과감한 패션을 선보이면서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당시로선 파격이라 할 만했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입는 민소매 옷은 어땠을까?

등거리: 등만 덮을 만하게 걸쳐 입는 홑옷. 베나 무명으로 깃이 없고 소매가 짧거나 없게 만든다.

등거리: 등에 걸쳐 입는 홑옷의 하나. 여름에 땀이 옷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입는 베옷으로, 주로 일할 때에 등에 걸쳐 입는다. 조끼처럼 깃이 없고 소매는 짧게 하거나 아주 없게 만든다.

앞엣것은 표준국어대사전, 뒤엣것은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지금은 저런 낱말이 있다는 것도 아는 이가 드물다. 등에 거는 정도로만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었을 테고, 예전에는 농촌에서 일하던 남자들이 흔히 입던 여름옷이었다. 국어사전의 풀이에 나와 있듯 주로 베나 무명으로 만들어 입었다. 베로 만든 건 베등거리라고도 하며, 땀을 받아 내기 위한 옷이라는 뜻을 담아 땀등거리라는 말도 만들어 썼다.

이런 등거리는 주로 하층민들이 입었던 옷이고, 같은 등거리라도 양반 같은 상류층이 입던 건 따로 있었다. 국어사전에 대등거리, 등등거리, 갓등거리 같은 낱말이 표제어로 올라 있다. 대등거리는 대를 가늘게 쪼개 엮어 만든 것이고, 등등거리는 등나무 줄기를 엮어 만든 것이다. 그러니 그 사이로 바람이 얼마나 잘 통하겠는가. 대등거리나 등등거리만 걸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 위에 얇은 겉옷을 입었다. 땀이 옷에 달라붙지 않도록 중간 기능을 하도록 만든 셈이다. 그와 달리 갓등거리는 토끼나 너구리, 양 같은 짐승의 털로 소매 없이 만든 겉옷으로, 지금의 조끼에 해당하는 옷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거리가 들어간 말 중 이상한 풀이를 달고 있는 게 보인다.

색등거리(등거리): <역사> 도둑이나 죄인을 묶을 때에 쓰던, 붉고 굵은 줄.=오라.

오라와 같은 뜻이라는 데 선뜻 믿기 힘든 풀이이다. 같은 낱말을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색동마고자의 비표준어라고 했다. 색동마고자는 색동으로 소매를 대어 만든 어린아이용 마고자를 뜻한다. 어느 게 맞을까? 색등거리는 용례를 찾기가 힘든데, 다행히 쌍상투 짜고 색등거리 입고 가는 아희야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가 전한다. 이로 보건대 죄인을 묶는 오라와는 상관이 없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풀이가 맞는 듯하다.

마고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올 때 그곳 사람들이 마괘(馬褂)라고 부르던 걸 입고 온 뒤부터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거리와 달리 소매가 달렸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이 색등거리를 비표준어로 처리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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