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68) / 시총(詩塚)
■ 박일환의 낱말여행 (68) / 시총(詩塚)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11.09 02:40
  • 호수 11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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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에 시신 대신 시(詩)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무덤은 사람의 시신을 묻은 곳이다. 그런데 전쟁 중에 전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거나 타향에서 객사하여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을 경우 무덤을 어떻게 조성했을까? 강은교 시인의 초기작 중 허총가(虛塚歌)연작이 있다. 한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허총(虛塚)이란 시신이 없는 무덤을 말하며 허묘(虛墓)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어사전에는 허총(虛塚)도 허묘(虛墓)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 한자 표기가 다른 허묘(墟墓)가 표제어에 있으며, 풀에 묻혀 폐허가 된 무덤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순우리말로는 묵뫼라고 한다.

시신은 물론 아예 아무것도 넣지 않고 조성한 무덤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허전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전에 고인과 관련한 물건을 넣어서 조성한 무덤들도 있다. 무엇을 넣었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기 마련이고, 각종 기록에 따르면 다양한 형태의 허총(虛塚)이나 허묘(墟墓)가 있다. 머리카락을 넣으면 발총(髮塚), 이빨을 넣으면 치총(齒塚), 신발을 넣으면 혜총(鞋塚), 옷을 넣으면 의총(衣塚), 그중에서도 피 묻은 옷이나 수건 등을 넣으면 혈총(血塚)이라 부르는 식이다. 전쟁에 나가는 사내가 전사할 경우 시신 확인을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경우가 있는데, 시신을 찾지 못하면 문신할 때 흘러나온 피를 닦은 옷이나 수건을 대신 묻었다고 한다. 이런 무덤을 혈총이라 한다는데, 중국에서나 있었을 법한 사례다.

지금 말한 무덤들의 명칭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나오지 않으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발총(髮塚)과 치총(齒塚)이 올라 있다. 발총은 뜻만 풀었으나 치총은 고양시 벽제관 옆에 있으며, 서울 북촌에 사는 양반인 평양(平壤) 조씨(趙氏)의 무덤으로, 시신 대신에 생전에 조씨가 기생에게 빼 준 이빨로 만든 무덤이라는 설화가 전해진다는 설명을 달았다. 호기심 때문에라도 사람들 입에 꽤 오르내렸을 텐데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그런 무덤이 있다는 내용을 찾지 못했다. 고양시에 그런 무덤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독특한 무덤 이름이 실려 있다. 유골 대신 시를 묻었다는 시총(詩塚)인데,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기슭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세아와 그의 아들 정의번이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한 싸움에 나섰다. 왜군과 혈전을 벌이던 중 적에게 포위된 정세아를 구출하기 위해 정의번이 세 차례나 적진으로 뛰어들었다가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시신을 찾지 못해 지인들에게 정의번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도록 부탁하여 모은 시문을 묻은 다음 시총이라 했다. 정의번의 시총보다 그 아래 있는 다른 무덤을 주목한 시인이 있다. 정의번이 출정할 때 따라간 억수라는 몸종이 있었다. 위험에 처한 정의번이 억수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억수는 주인과 종은 한몸이라며 거부하고 함께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런 억수의 마음을 높이 사 정씨 가문에서 따로 억수의 무덤을 만든 다음 그 앞에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영천 출신인 이중기 시인은 억수 무덤이라는 시에서 어느 문중 산소 아흔아홉 풍광 압권은 따로 있다/ 일찍이 내가 노래하다 말고 악보를 찢어버렸던/ 그 시총(詩塚) 아래/ 노비,/ 억수 무덤 있다라고 했다.” 아흔아홉이나 되는 양반 가문의 무덤만 기리지 말고 전사자 명단에도 오르지 못한 노비였던 억수라는 이름을 기려야 하지 않겠냐는 시인의 마음을 담았다.

국어사전에 없는 독특한 무덤 이름 하나 더 소개한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가면 말[]을 묻은 말 무덤이 아닌, 다른 말 무덤 즉 언총(言塚)이 있다.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 사소한 말로 인한 문중 간 싸움이 잦았는데, 지나가던 과객이 예방책을 일러준 대로 말 무덤을 만들었더니 그로부터 마을에 평온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조성 연대는 정확지 않으나 마을 사람들은 400~500년 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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