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피딱지
■ 박일환의 낱말여행 / 피딱지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12.14 09:15
  • 호수 11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닥나무에서 나온 낱말들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경상북도 경주 출신인 박목월 시인은 1968년에 고향의 풍경을 주로 담은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을 펴냈다. 그 시집에 실린 시 중에 경상도 고향 마을 사람들 모습을 그린 피지(皮紙)라는 작품이 있는데, 중간에 皮紙 같은 얼굴들이/ 히죽히죽 웃는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얼굴을 비유하기 위해 끌어온 피지(皮紙)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피지(皮紙): 닥나무 껍질의 찌끼로 뜬 품질이 낮은 종이.=피딱지.

품질이 낮은 종이라고 했으니, 농사일하느라 햇볕에 그을린 시골 사람들의 얼굴을 묘사하는 데 맞춤한 낱말로 다가온다. 물론 피지라는 낱말의 뜻부터 알아야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피지의 풀이 뒤에 동의어로 제시한 피딱지라는 낱말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피딱지라고 하면 상처 따위에 피가 굳어서 된 딱지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와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닌 동음이의어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으며, 그런 낱말을 사용하기는 했던 걸까? 표준국어대사전은 피딱지를 피지와 똑같은 뜻으로 풀이한 다음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아래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얼마 뒤에 중 하나가 피딱지에 싼 물건을 새끼로 동여 들고나와서 바로 유복이를 주는데 부피도 있고 무게도 있었다.”

이로 보아 피딱지가 종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건 분명하다. 피딱지라는 말이 생겨난 까닭을 살펴보기 전에 한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우리 전통 한지는 대체로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서 만든다. 그런 종이를 뜻하는 낱말인 닥종이닥지가 국어사전 안에 들어 있다. 닥나무를 뜻하는 한자 저()를 써서 저지(楮紙)’라 부르기도 한다. 같은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 만들었어도 종이 질은 다양했을 것이고, 그중 하품(下品)에 속하는 걸 피지라 불렀다. 그런데 피지가 꼭 닥종이를 뜻하는 말로만 쓰였을까?

녯날 고대 희랍(希臘) 사람과 로마(羅馬) 사람은 일즉이 납을 가지고 가죽조히(皮紙) 위에 긔호(記號)와 외여 둘 만한 것을 써주엇스며(동아일보, 1930.12.4.)

영국 상원이 수 세기 동안 양이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피지(皮紙)에 법을 기록해 오던 전통을 폐지하고 종이를 도입하기로 했으나.(연합뉴스, 2016.2.11.)

위 기사들에서 보는 것처럼 동물 가죽으로 종이처럼 만든 것도 피지(皮紙)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한 적이 없는 탓에 국어사전 편찬자들이 그와 같은 뜻을 담지 않은 듯하다. 대신 양가죽을 이용해 만든 양피지(羊皮紙)와 송아지 가죽을 이용해 만든 독피지(犢皮紙)를 표제어로 올려놓고 있다.

앞서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 만든 종이 명칭으로 닥지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피딱지는 아마도 피와 닥지를 합친 피닥지가 변해서 된 말일 것이다. 전주한지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한지의 종류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피지(皮紙)피닥지로 만든 질이 낮은 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전북 진안에서 고사 지낼 때 부르는 고사 소리 가사에 낙고지 별백지 구지 명지 장지 전양지 피닥지 앞뒤 선반에 얹어 두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종이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 대목으로, 끝에 피닥지가 있다. 피닥지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지만 내 추론이 영 엉뚱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