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 (75) 항룡(亢龍)
■ 박일환의 낱말여행 / (75) 항룡(亢龍)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4.01.04 05:28
  • 호수 11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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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여러 형태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2024년이 밝았다. 올해는 갑진년으로 용의 해, 그것도 청룡의 해라고 한다. 본래는 음력을 기준으로 해의 바뀜을 따졌으나 요즘은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어졌으며, 청룡의 해라고 하는 건 십간(十干)에서 갑()()이 파란색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십이지(十二支)에 따라 열두 해를 기준으로 해마다 상징하는 동물이 바뀐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설화에 따르면 신이 달리기 경주를 시켰을 때 쥐가 일 등으로 들어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데, 그런 얘기는 누군가가 재미 삼아 만들어 낸 설화일 뿐이다. 정작 궁금한 건 다른 동물은 모두 자연계에 실존하는데 어떻게 해서 상상의 동물인 용이 십이지에 들어갔느냐 하는 점이다. 몇 가지 설이 있긴 하지만 다들 추정일 뿐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억지 논리를 끌어오느니 궁금증으로 남겨 두는 도리밖에 없다.

용은 오랜 옛날부터 봉황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되어 왔으며, 용과 관련한 낱말과 설화가 무척 많다. 용의 종류 또한 다양해서 색깔에 따라 청룡, 적룡, 황룡, 흑룡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한 쌍의 용을 뜻하는 쌍룡(雙龍), 사납고 악독한 기운을 지닌 악룡(惡龍)이나 독룡(毒龍)을 비롯해 초야(草野)에 묻혀 있는 큰 인물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인 와룡(臥龍) 같은 낱말도 있다. 와룡(臥龍)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비슷한 뜻을 지닌 잠룡(潛龍)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텐데, 일단 다음 낱말부터 살펴보며 이야기를 이어가자.

항룡(亢龍): 하늘에 오른 용이라는 뜻으로, 아주 높은 지위를 이르는 말.

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중에는 높다혹은 높이 오르다라는 뜻도 있다. 항룡(亢龍)은 일상에서 많이 쓰는 말은 아니나 주역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을 듯하다. 주역 건괘(乾卦)에서 육효(六爻)의 뜻을 설명한 효사(爻辭)에 네 마리의 용이 나오는데, 각각 잠룡(潛龍), 현룡(見龍), 비룡(飛龍), 항룡(亢龍)이라 했다. 우리 국어사전의 흠이라면 낱말의 출처와 예문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같은 계열의 낱말인데도 어떤 건 싣고 어떤 건 싣지 않는 불균형한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다. 잠룡, 비룡, 항룡은 표제어에 있지만 현룡은 없는 게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잠룡이 아직 물속에 있는 용이라면 현룡은 물 밖으로 나온 용을 말한다. 주역에서는 재전(在田)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을 드러내어 정당한 지위를 얻은 다음 덕을 펼치는 단계를 말한다. 그다음이 비룡인데,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뜻을 담아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 했으며 제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까지가 최상의 단계일 텐데, 주역은 한 단계를 더 설정했으니 그게 바로 항룡이다.

항룡은 홀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대개 주역에 나와 있는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성어로 통용되지만, 비룡재천은 표제어에 오른 반면 항룡유회는 오르지 못했다. 풀이하자면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하게 된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말이다. 공자는 항룡유회를 풀이하며, 貴而無位(귀이무위), 高而無民(고이무민), 賢人在下位而無輔(현인재하위이무보), 是以動而有悔也(시이동이무회야)라 했다.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높으나 백성이 없고, 현인이 밑에 있어도 도움이 없으니 이로 인해 움직일수록 후회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항룡은 단순히 아주 높은 지위만 뜻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지위는 좋지 않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국어사전 풀이로는 그런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 편찬자가 낱말의 출처를 모르는 상태에서 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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