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남매의 장남, 5남매의 아버지
7남매의 장남, 5남매의 아버지
  • 공금란 기자
  • 승인 2004.09.17 00:00
  • 호수 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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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판교2구 이장까지
   
9월13일 판교면 판교리 2구에 이동군수실이 찾아가던 날 마을은 잔치 분위기였다. 하긴 촌사람들에게 있어 군수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어른일 수밖에. 이날 이 마을의 버팀목 같은 일꾼 신광섭(69)씨가 군수표창을 받게 돼 있었지만 그의 아내 유혜영(67)씨가 대신 나왔다.

사정인즉, 오랜 육신의 질병으로 군내 병원이란 병원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딱부러지게 진단을 내려 주는 곳 없이 서울의 큰 병원에서 검사받기로 예약된 날이 바로 그날이라는 것이었다. 먹고 살만하면 아프다더니, 신광섭 씨는 단 하루를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검사를 마지막 열차, 그러니까 서천역에 자정이 넘어서야 도착하는 열차를 타고 왔다는 다음날 판교리를 찾았을 때도 그의 손에선 일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래도 살아있으니 일 해야지 어쩌것슈”하며 어설픈 웃음을 짓는다.

슬하에 5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두 식구만 산다더니 이제 일을 그만 저만 해도 될 터인데, 이직도 고추 3천포기를 심고 마늘농사를 짓고 있단다. 이러니 텃밭에 세워 논 비닐하우스 마다 고추가 가득히 널려 있을 수밖에. 그나마 논농사는 힘들어서 남주고 집 앞 다랑이논을 부치고 있었다.

“이것도 힘에 부쳐 남주려 해도 누가 이런 다랑가지 농사질라구 해야쥬, 진작에 휴경논 신청이나 할 걸 잘못했네유” 고개가 무거워지는 벼이삭을 보면 좋을 법도 하지만 이제는 지쳤는지 버겁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하긴, 5남매나 키워 출가시켰어도 버거울 텐데 7남매 장손으로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거두고 가르쳤다니 지칠 법도 하겠다.

“어쩔 수 없었지유, 아버지가 6·25때 대전 형무소로 끌려가서 처형 당하셨으니께유”하고는 이내 “우리 어머니가 장한 어머니시지유” 해놓고는 아내를 보며 “집사람도 참 욕봤지유” 한다.

민족의 아픔이 여기에도 있었다. 군 양정계에서 일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친일을 했다고 처형하는가 하면, 미군들이 양민들을 학살한 일이 바로 판교에서 벌어졌으니 말이다.

이런 헝클어진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잡아 억울한 영혼은 달래주고 큰 죄를 짓고도 활보하는 이들에게는 양심을 회복할 기회를 줘야하지 않겠는가?

신광섭 씨, 그는 이 땅의 진정한 농부고 아버지고 아들이었다. 이제 노동으로 지친 그에게 찾아온 것은 육신의 질병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마을이장 일을 12년씩이나 맡아온 그에게 마을 사람들은 작은 선물로 군수 표창을 받도록 주선한 것이다. 돌아오는 한가위에 찾아든 자손들을 앉혀 놓고 자랑을 해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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