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돋보기
걸신/걸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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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신/걸씬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5.04.15 00:00
  • 호수 2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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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마다 한자말이라며 ‘걸신’(乞神)이란 것을 조작하여, 그 뜻을 “①빌어먹는 귀신 ②염치없이 지나치게 탐하는 마음”이라고 해놓았다. 빌어먹는 귀신도 없고 그런 말도 없다.

그런 중에서 〈우리말 큰사전〉(1992)처럼, ‘걸신’(乞神)은 없이, 우리말 ‘걸씬’을 “굶주리어 음식을 구하는 탐욕”이라고 풀이하고, 그 쓰임으로 ‘걸씬들리다, 걸씬스럽다, 걸씬장이’ 들을 들어놓은 것도 있다. 다 옳고 아귀가 맞는다.

우리말 ‘걸씬’과 비슷한 ‘걸태질’은 “염치없이 재물 따위를 마구 긁어 모으는 질”이다. 여기에 무슨 한자가 필요한가.

다른 사전들은 우리말 ‘걸씬’이 싫어서 어떻게든지 한자말로 꾸미려고, 빌어 먹는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乞神’이라는 헛것을 만들어 싣고 ‘에헴!’ 하는 것이다.

제 할아비 나라 것으로만 보이면 거짓 것에도 사죽을 못 쓰는 무리들의 짓이다.
‘걸씬’은 그 말밑을 있지도 않은 한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찾을 수 있다.
‘걸씬’의 ‘걸-’의 쓰임을 찾아보자.

‘걸걸거린다’고 하는 ‘걸걸’은 “음식이나 재물에 염치없이 욕심을 부리는 꼴”이다.
‘걸뛰다’는 “걷잡지 못하게 마구 뛰다”라는 뜻이고, ‘걸밥’은 “먹다 남은 음식”이다.

‘걸-’은 그 ‘걸걸, 걸뛰다, 걸밥’ 들의 ‘걸-’과 어울린다.
‘걸씬’의 ‘-씬’도 ‘날씬·늘씬’하고, 냄새가 ‘물씬’ 나고, ‘양씬’(실컷) 먹고, ‘얼씬’도 하지 말고, ‘훨씬’ 좋고, ‘흠씬’ 맞고 하는 말들의 ‘-씬’처럼 얼마든지 쓰인다.

"한참"과 "한창"  

"우리가 길을 떠난 지 한창 되었는데, 다 와 가는가 어떤가."
이렇게 더러 "한창"이란 말을 쓰는데, 과연 옳게 쓰이는 걸까.

"한창"이란 말은 '일이 왕성하고 무르익을 때'라는 뜻으로 "지금 가을걷이가 한창이다."처럼 쓰이고, 또 '일이 무르익고 활기 있게'라는 뜻으로 "대학에 들어가면 한창 공부해야 할 텐데, 우리 집 아이들은 놀기만 한다."처럼 쓰인다.

한편 "떠난 지 한창 되었다."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한참"이란 말을 써야 한다. "한참"은 '시간이 어지간히 지나는 동안'이란 뜻으로 "한참 걸었더니 땀이 난다." 또는 "만나기로 한 친구를 한참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처럼 쓰인다.

그러니까 앞에 든 말은 "길을 떠난 지 한참 되었다."라고 해야 한다.
"한참"은 옛날에 역참과 역참 사이의 하나를 뜻하던 말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그 뜻이 '시간'이나 '동안'으로 번진 것이다.

"한참"과 "한창"의 구별이 잘 안 되면, 그 말이 쓰인 자리에 "한동안"을 바꾸어 넣어 보면 안다. 말이 되면 "한참"이고, 말이 안 되면 "한창"이다.

<정재도 / 한말글 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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