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 동경지검 특수부 검사의 증언
전(前) 동경지검 특수부 검사의 증언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5.07.01 00:00
  • 호수 2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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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여는 강연
홋타 스토무 사아야카복지재단 이사장

   
1976년 7월 27일 새벽 6시. 다나카 전 일본 총리가 자택에서 전격 연행됐다. 전일본항공사(ANA)에 미국의 록히드사 항공기를 구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대가로 마루베니상사를 통해 5억엔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혐의였다.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머릿수와 돈”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정경유착과 파벌정치를 주도했고, ‘불도저 총리’와 ‘서민 총리’로 불리며 중일수교를 밀어붙였던 전후 일본 최대의 정치 거물인 다나카를 체포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동경지검 특수부 검사들이다.


57세에 검사를 그만 둔 뒤 ‘늦깎이’로 시민운동에 뛰어든 홋타 스토무  사아야카복지재단 이사장은 당시 실무 검사로 다나카 체포와 기소에서 논고와 구형까지의 전 과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록히드 사건의 실무 검사 출신답게 홋타 이사장은 당시의 비화 몇 가지를 털어놓는 것으로 강연회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동경지검 특수부가 다나카 체포와 기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사연은 록히드 사건 발생 22년 전인 1954년에 동경지검 특수부가 정치적 압력에 무릎을 꿇었던 ‘좌절의 추억’. 도리어 나중에 그것이 ‘전화위복의 반면교사’가 됐다는 것인데, 전말은 이렇다.


“특수부 검사들은 당시 여당인 자유당의 사토 간사장을 수뢰죄로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누카이 법무대신이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발동하여 체포를 중지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도 정치가인 법무대신이 일반 검사의 사건 처리와 관련해 직접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법률상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이 지휘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무대신이 어떻게 해서라도 개입하고자 할 때에는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을 발동해야  했는데, 이누카이 법무대신이 이 규정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를 연 후과는 엄청났는데,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이누카이가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어느 법무대신도 검찰총장  지휘권을 발동하지 못하는 전통이  수립됐는데, 이 전통의 위력은 록히드 사건 당시 유감 없이 발휘됐다고 한다.


실제로 다나카가 정치력을 발휘해 측근을 법무대신으로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무도 다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만용을 부리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사연은 특수부 검사들이 정치인의 미묘한 관계까지 염두에 두고 체포 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록히드 사건 당시 총리는 최소 파벌의 미키였는데, 최대 파벌의 다나카와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부패의 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들은 스캔들은 서로 덮어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나카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미키 총리는 물론이고 법무대신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나카와 그 측근들은 체포되기 직전까지도 수사의 손길이 자신들에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었다.


다나카가 용의자이며 그를 체포할 것이라는 사실을 법무대신에게 보고한 것은 체포  작전에 돌입하기 하루 전날의 오후였다.”


그러나 어쩌면 동경지검 특수부가 정치적 압력을 이겨내고 다나카를 기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부패 청산 의지에 대한 일본 국민의 강한 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엄습하는 궁금증 하나. 잘 나가던 검사가 늦은 나이에 복지문제를 고민하는 시민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30대 후반에 미국 근무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던 두 아들도 미국으로 데려가야 했는데, 영어도 못하고 키도 작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막상 워싱턴DC 근교에 거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새로운 미국인 친구를 만들었고, 이웃의 어른으로부터 축구 지도까지 받았다.


당시 차별과 왕따가 전혀 없는  개방된 미국 문화를 체험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도리어 문제는 귀국 후에 발생했는데, 아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온 뒤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한 것이다.


그때 검사를 그만 두면 관용과 배려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시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홋타 이사장은 일본 사회가 고도성장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구조개혁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1993년 자민당의 38년 장기집권을 중단시켰던 호소카와 총리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이유도,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으로불리는 장기적인  혼미의 수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인은 용기가 부족하다.

이제 일본의 마지막 희망은 자원봉사와 NPO 활동  등을 실천하는 시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여의도통신=정지환 기자>


홋타 스토무 이사장의 이력서


▶ 일본 동경대 법학부 졸업

▶ 대판지검 특수부 검사

▶ 법무성 형사국 부검사

▶ 주미일본대사관 일등서기관

▶ 동경지검 특수부 검사

▶ 갑부지검 검사장

▶ 법무대신 관방장

▶ 건설성 중앙건설업심의회 위원

▶ 문부성 교육과정심의회 위원

▶ 후생성 중앙사회복지심의회 위원

▶ 경기청 국민생활심의회 위원

▶ 동경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 후로성 사회보장심의회 복지부회, 의료부회 위원


저서: 벽을 뚫고 나아가라, 뽐내지 마라 상사, 마음의 부활,  삶의 보람 대국, 중년이요 꿈을 품으시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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