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이야기(1)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땅 판교면 “복대리2구”
우리마을이야기(1)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땅 판교면 “복대리2구”
  • 이후근 기자
  • 승인 2006.02.24 00:00
  • 호수 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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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에게는 치유의 손길이 필요하다

주로 자연의 생김새에 따라 형성된 기본적인 주거 공간단위를 ‘마을’이라 부른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마을은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주거공간을 넘어 경제·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단위이기도 했지만 마을들은 비교적 완고하게 그 모습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전통마을들은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탈·이농, 고령화로 상징되는 산업화는 급속하게 농촌지역 전통마을들의 변화 또는 해체를 강요하고 있다. 언론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언론들은 추억을 자극하는 식의 흥미위주의 보도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학계의 연구도 외형적 변화 등 표피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본지는 군내 자연마을들의 모습과 그곳에 깃들어 살고 있는 삶을 감상적 접근에서 벗어나 담담히 그려낼 예정이다. 또 공동체 그 자체이기도 했던 자연마을의 변화에 따른 사회문화적인 현상들을 짚어 봄으로써 전통공동체 붕괴에 대한 질문을 지역사회에 던져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판교면 복대2구 마을 전경 <사진/이후근 기자>
◆복대리 찾아가는 길

당초 그려진 취재계획은 많이 알려진 마을보다는 전통마을의 형태나 민속을 유지하고 있는 곳을 우선 찾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많이 알려진 마을들을 일단 제쳐놓고 비슷한 생김새를 갖고 있는 서천군 737개 자연마을 중에서 새로운 소재를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고민 중 지난해 연말 과거사 정리법 시행과 관련해 보도됐던 판교양민학살 사건(본지 2005년 12월 16일자 기사참조)의 현장인 판교면 인근 마을들 중에서 소재를 찾기로 했다.

56년 전 참사 현장을 꼭 한번 방문하리라던 ‘판교양민학살진상규명위원회’ 유충열 회장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백년 이상을 사랑하는 가족을 무고하게 떠나보내는 피울음 속에서도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던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초 기획의도와 견주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판교면 복대리, 옛 판교면 지역의 중심지로서 기능했던 판교리와는 부여군 홍산면으로 통하는 4번 국도를 사이에 둔 지척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은 노인전문요양의료기관으로 탈바꿈한 판교초등학교 뒤편 마을과 건너 마을 5개 반을 합해 복대2리 이고, 홍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간 곳이 복대1리 이다.

원래 이 일대는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 된 1914년 이전까지는 비인현의 동(東면)에 속하는 지역이었고 인접한 판교리 일대는 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관아가 있던 행정의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광천, 논산장과 더불어 서해안 일대 최고가는 소 장터가 섰던 이름난 장시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다 1931년 장항선 개통과 더불어 판교역이 생기면서 장터가 현암리로 이전하게 되자 이 지역은 한적한 마을로 남게 되지만, 6·25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은 참사의 현장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길 하나 건너 지척에 있던 복대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 복대2구에 사신다는 어르신. 장에서 뻥튀기를 팔고 집에 오시는 길에 우연히 기자를 만났다. <사진/이후근 기자> ◆감조차 잡히지 않는 지명유래 복대리(卜大里), 한자가 어렵게만 느껴지는 필자에게는 지명유래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복(卜)자가 들어간 것으로 봐서는 풍수학적인 의미가 들어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밖에 할 수 없었다. 마을로 들어서 주민들에게 물어도 아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다만 복(卜)은 전통신앙 상징물을 뜻하고 대(大)는 넓은 곳을 뜻하는 대(臺)에서 음을 빌려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지명유래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 할 수 있다. 즉, 불교사찰의 상징물인 당(幢)을 달아 세우는 기구가 있었던 넓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복대(卜大)란 지명에 대해 좀 더 명쾌한 가르침을 받았으면 한다. 그래서인지 산이랄 것도 없는 구릉 골골에 의지해 자리해 있는 복대리 전체가 제법 제단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복대리는 유터골, 진터리, 심망골, 안가실, 분동 등의 자연마을 5개 반으로 구성된 복대2구와 1구를 합한 법정리명이다. 판교리와 인접한 복대2구가 1구보다 마을규모가 크며 복대2구는 현재 65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5개 자연마을들 중에서는 2반 진터리에 48세대가 거주해 중심 역할을 하고 있고 큰길 건너 유터골을 제외하고 4개 자연마을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마을 입구에서 만난 나환석(75세)씨는 각 마을이름의 유래를 비교적 소상히 알려줬다. 유터골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어 기름유(油)자가 들어가 있고, 심망골은 심씨들이 망해서 나간 동네라는 등 나름의 해석과 함께. 그렇다고 이 마을에서 4대째 살고 있다는 나환석씨의 해석에 대해서 당장 확인할 길도 없지만 시비 걸 생각도 없다. 오랜 풍상을 거치고도 한 자리에 서있는 마을의 당나무를 닮아있는 나씨에게 다만 경의를 표하고 싶을 뿐이다. ▲ 어디를 가시는지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계신다. 과거의 슬픔은 슬픔대로 가슴에 묻고 주민들은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사진/이후근 기자>
◆56년 전 참사현장 증언들

나씨에게 마을에 대한 대강 설명을 들은 후 56년 전 일에 대해 다짜고짜 물었다. 그는 이내 “암 기억 하고말고,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어, 그 때 참 억울한 목숨들 많이 잃었지”라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미 알려졌던 것처럼 미군폭격 때문에 현암리 쪽에 장이 못서고 판교초등학교 뒷산 쪽 4호선 국도를 따라 임시장이 섰다.

또 한 쪽 솔밭에서는 우시장이 열렸다. 한창 장이 무르익어 장꾼들이 몰려든 시기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서천 쪽에서 내려온 인민군 장교를 태운 몇 대의 오토바이가 부여 쪽으로 향한 뒤, 곧이어 미군기의 급속한 강하와 함께 요란한 기총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나씨가 목격한 참사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창자가 터진 사람, 한쪽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장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비명들로 가득했다. 임시장이 섰던 길 건너 마을에 살았던 나씨는 사건현장을 소상히 기억해 냈고, 억울한 죽음들에 대해 기억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증언들을 나씨 말고도 마을주민 몇 몇에게서 더 들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정확한 현장증언은 필요 없었다. 다만 이 생생한 증언들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 때 그 상처를 몸 속 깊은 곳에 숨기고 숨죽여 살아야 했던 마을사람들과 유족들의 가슴앓이를 이제는 치유해 줄 수 있어야 한다.

◆600년 된 당나무는 쓰러지고

장에 갔다 돌아오는 할머니들을 만나 학살사건 얘기, 살아가는 얘기를 들은 후 본격적인 마을 돌아보기에 나섰다. 언덕너머 한 마을 그리고 또 한 마을, 비산비야의 남쪽 지역의 마을들과는 확연히 구분되게 제법 산촌마을의 정취도 느껴진다. 그리고 판교가 자랑하는 한우농장의 누렁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키웠다지만 이제는 6농가만 남았다. 한동안 소값이 좋아 제법 소득도 됐지만 그나마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되면서 사육두수가 형편없이 줄었다.

허락도 없이 마을 이곳저곳을 드나들며 기웃거리던 기자가 눈에 거슬려 오세종(74세)이장이 찾아왔다. 마을을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자 오씨는 “뭐 적을게 있는 마을이 아녀, 내세울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마을이여”한다.

그러면서도 오씨는 “우리 죽으면 이 마을도 끝이여”하며 농촌마을의 암담한 미래에 대해 말했다. 30년을 이장일을 맡아 안길도 멋지게 포장하고, 농촌지역에는 드물게 마을어린이놀이터도 설치하는 등 많은 일을 해왔던 오씨에게도 현실은 결코 부정 할 수 없었으리라.

   
▲ 600년 된 당나무는 콘크리트 벽이 생긴 뒤부터 죽기 시작했다.
지금은 주민휴게소라 불리는 마을회관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그 옆 6백년도 더 됐다는 설명이 무색하게 거의 분재수준으로 남아있는 당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당제도 지내고 한 여름 주민들의 쉼터 역할도 해냈을 당나무가 죽기 시작한 것은 놀이터를 설치하면서 주위에 콘크리트 벽을 둘러치면서부터였다. 되살릴 방법도 없다고 했다.

콘크리트 벽이 당장은 보기 좋았겠지만, 결국 갖은 풍상을 겪고도 살아남았던 고목을 단 몇 년만에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래도 당나무 저것 만큼은 아니지만 오늘도 깊게 패인 주름사이로 미소를 지으며 복대2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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