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선생추모제를 상기하며
월남선생추모제를 상기하며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03.31 00:00
  • 호수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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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3월 29일 월남 선생이 타계하시고 고향 서천에서의 추모제는 20여년 만에 다시 시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선생은 조선말 선비와 관료, 대한제국의 관료 등을 지내며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우리민족의 절박한 시기에 한 시대를 이끌었던 선각자이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는 추모제를 유교식으로 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독교를 접하고 YMCA 조선인 최초 총무를 역임할 정도로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를 신봉하였다 할 것이다.

최근 선생의 사상을 바탕으로 김명구(서울장신대 교수)씨는 박사학위를 받은바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식 추모제를 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3월 29일 선생의 생가에서 거행된 추모제가 그 양쪽을 수응하는 식으로 향교의 유교식 제례와 국화꽃을 헌화하는 순서를 같이 하는 것을 보고 묘한 생각이 들었다.

추모제를 처음 시도한 단체는 서의회로 알려졌는데 내부의 이견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추모제가 허술하게 치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월남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 등이 이데올로기까지 겹치면서 좌우갈등을 겪고 있을 때도 양쪽을 어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지자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고향서천에서의 추모제도 지역의 시민과 단체, 종교까지도 함께 했어야 했다. 아무튼 여러 가지 미숙하고 쑥스러운 모습이 많았지만, 월남선생을 기리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월남선생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가지 사업이 잘 이루어지도록 모두 중지를 모아야 한다. 오늘 김명구 박사의 씁쓸해 하는 표정에서 서천군민의 우매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 자신도 쥐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에서는 5·31일 지방선거 때문인지 이날 무궁화 꽃이 화들짝 피었다 금방 사그라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월남선생께서 강의할 때, 일본순사들이 꼬이는 것을 보고 “개~나리 꽃이 활짝 피었구나” 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진정으로 선생을 추모는 마음이 아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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