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의 문화재 탐방 <2> 성곽-산성(山城)
우리고장의 문화재 탐방 <2> 성곽-산성(山城)
  • 이강선 기자
  • 승인 2006.04.28 00:00
  • 호수 3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지산성·서천남산성·서천장암진성 -

▲ 건지산성1. 건지산성 정상부에서 바라본 한산면 시내조망. 멀리는 금강이 바라다 보이고, 서천읍성, 서천남산성, 천방산, 서해바다 등 훌륭한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다. 성곽이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린 큰 담으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모두 포함한다. 성곽이 위치하는 지형에 따라 산성·평지성·평산성(야지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산성은 산에 위치하는 성곽을 말하고, 우리나라의 산성은 중요한 군사기지로써 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전에 큰 몫을 담당했기 때문에 산성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서천군 발행의 내고장문화유적총람(2집, 성곽 및 금석문편, 1993)에 의하면 우리고장에 성곽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산성 29지점, 읍성 3지점, 진성 2지점으로 확인되었다. 우리지역의 산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대부분이고,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는 남산성(서천 남산), 산천리산성(종천), 장구리산성(종천), 월명산성(비인), 관적곡산성(비인 성내리), 불당곡산성(비인 성내리) 등이 있다. 토석혼축성은 건지산성(한산, 기산), 성북리산성(비인), 영모리산성(기산) 등이다. 우리고장은 금강하구에 위치한 입지적, 지형적 환경으로 백제의 웅진시대 : 사비시대의 중요성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천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현재의 부여)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아울러 금강을 통하여 웅진(현재의 공주), 사비를 해상과 연결하는 입구에 해당한다. 그래서 서천이 백제시대에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서천에 분포되어 있는 백제시대 산성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건지산성(乾芝山城) 건지산성은 한산면 지현리, 죽촌리, 호암리와 기산면 영모리에 자리 잡고 있는 사적 제60호의 국가지정 문화재이다. 건지산성은 백제부흥군의 거점으로써 부흥군 주류성의 위치지정 문제와 관련하여 항상 논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1999년에 이루어진 충청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조선중기 무렵의 건물지 1동이 노출되었고, 동쪽 성벽은 주로 성토기법을 이용한 토석혼축성인 반면, 서쪽 성벽은 순수 토축성으로 확인되었다. 그 주변에서 고려후기의 청자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백제성이라기보다는 고려후기의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동쪽 성벽 위에 조성된 건물지에서는 상평통보 당일전과 중형전이 출토되어 조선후기까지 이 성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산면사무소 옆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건지산성의 정상부에 이르는데 그곳에서는 사방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육지를 이용하는 적군과 해상으로 밀려오는 적의 침입을 파악하는 데 훌륭한 요지라고 할 수 있다. ▲ 남산성2차 발굴조사 후 방치되고 있는 발굴지의 모습과 문화재를 훼손하고 있는 방송국 송신탑.

▲ 서천남산성(舒川南山城)

서천남산성은 시도기념물 제96호로 서천읍 남산리와 마서면 봉남리의 남산 정상부(해발 146.9m)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방을 바라보면 어느 한 곳 막힌 곳이 없을 정도로 서천군 전반의 지형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남산성이 소재한 서천군은 금강을 끼고 있어 내륙으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과 고대 해운 교통로로써 이전부터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남산성이 위치하는 남산은 서천읍의 남쪽에 동서로 4km 남짓하게 좁고 길게 병풍처럼 이어진 야산지대 중 하나로 주봉에 해당되며, 넓은 평야지대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서천군의 전반적인 지형이 한눈에 보인다.

서천남산성은 현 서천읍성이 조선 세종대에 읍치를 이전하기 전까지 옛 서림군의 읍성이었던 곳으로 여러 문헌에 기록되었음에도 그 동안 구체적인 규모나 구조 등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001년과 2004년의 두 번에 걸친 발굴조사결과 다량의 '西林郡'명 기와를 성의 내부와 외부에서 발굴됨으로써 문헌기록이 사실로 증명되었으며,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남산성은 여러 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벽과 문지시설이 중첩되어 있어 보다 구체적인 성벽의 축성부법과 문지시설의 변화과정을 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천읍에서 남산성이 가지는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오랫동안 폐성으로 방치되면서 급격히 훼손되고 있었으며, 성정상부에 방송용 송신탑을 설치하면서 중요 시설을 파괴하고 성의 경관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다.

   
▲ 장암진성
1. 성의 동쪽 벽 끝자락에서 구장항제련소쪽(전망산)을 바라본 모습.

▲ 서천장암진성(舒川長巖鎭城)

서천장암진성(舒川長巖鎭城)은 시도기념물 제97호로 해발 90.1m의 후망산(後望山) 남서쪽에 길게 드리워진 말미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성이라기보다는 평지성에 가깝다.

성벽은 해발 4~43m 사이의 산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의 둘레는 640m로 전체형태는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쪽 벽과 북쪽 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있다.

현재는 성내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 벽은 일제시대에 석축을 헐어 장항제련소 공장부지를 조성하는데 사용되어 형태가 잘 남아 있지 않다.

성의 서쪽 벽과 서쪽 전방에 위치한 전망산(제련소 굴뚝이 위치한 산) 사이에는 본래 해수가 들고나는 지역으로 천연의 해자(성밑의 연못)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나 매립되어 현재 공장부지와 전답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망산(前望山)에 오르면 금강하구와 서해바다가 한눈에 조망되며, 성의 후면에 위치한 후망산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서천남산성(서천읍 남산리)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천장암진성은 장항제련소가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성벽과 남문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장과 민가가 들어서면서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장항산업도로가 장암진성의 일부를 지나감에 따라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간헐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성의 일부는 석축으로 복원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고장에 산재되어 있는 산성 중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건지산성, 서천남산성, 서천장암진성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문화재는 역사의 살아있는 교육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보존과 적절한 정비?복원을 하고 점진적으로 주변일대를 동시에 정비하여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일조를 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