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모시관의 모시각 시비는?
한산모시관의 모시각 시비는?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10.27 00:00
  • 호수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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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락의 한시 ‘백저사’
▲ 한산모시관 모시각 시비 한산모시관 뒷곁 맨 위쪽에 모시각이 있다. 거기에 시비 하나가 있다. 시비의 뒷면에 괴음(槐陰) 신영락(申英樂)의 한시, 노흥래 역, 박우철 서 ‘백저사(白紵詞)’가 있고 앞면에는 구인환의 글, 구영환 서 ‘한산 모시의 유래’가 적혀있다. 공주대학교 김경화 작으로 모시적삼을 입은 선비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는 시비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시각을 둘러보면서도 신영락이 누구이며 백저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 신웅순<중부대 교수>
신영락은 조선 후기 관산융마로 일세를 풍미했던 한산 숭문동 출신 석북의 증손자로 숭문 8문장의 한 사람이다. 석북 광수, 기록 광연, 진택 광하 3형제를 3광이라 했고 석북의 아들 3형제와 손자 및 증손을 포함하여 숭문 8문장이라 했다.

그는 순조 을미생으로 계묘에 진사가 되었고 경신년에 졸했다. 천성이 관후하고 문사에 능했다고 한다.

“鵝州女兒年十五, 生長土窟纖纖紵 (한산골 아가씨 그 나이 열다섯살  토담집에 자라나서 가는 모시 짜고 있네)” 로부터 시작되는 이 한시는 시집와서 정성으로 베를 짜는 여인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시집갈 때 규슈범절, 바느질 먼저 묻지 않고 길쌈 재주 먼저 묻는다는 당시 19세기 초 한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가 있다.

모시각은 모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다. 모시각을 둘러보면서 모시의 유래와 백저사를 감상하는 것도 빼놓을 수없는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모시는 백의민족의 상징이다. 잠시 모시각에 모시의 풍요를 염원하면서 한민족의 통일을 기원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신영락 묘소는 석북 묘소 뒤편 오른쪽 언덕배기에 있다. 고령신씨 후손들은 선조의 ‘영락’의 함자를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영락없다’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사의 후손답게 조상을 소중히 모시는 고령신씨의 문중 풍도를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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