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불
등 불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12.14 00:00
  • 호수 3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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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웅 순
칼럼위원

어머니의 등불은 그 옛날 동구 밖에서 아버지를 한없이 기다렸던, 들녘으로 아버지를 한없이 마중 나갔던 등불이다. 낙엽이 우수수 지는 늦가을이나 함박눈 펑펑 내리는 겨울 같은 등불이다. 어머니의 등불은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녘 끝에 있으며 깊은 산골에 있다. 마지막 바람 소리가 들리고 마지막 물소리가 들리는 먼 하늘가나 외진 숲 속 같은 데에 있다.

언제나 강 건너에 있으며 통통배를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등불이다. 막 버스가 지나가고 밤 기차가 지나가는 설움도 그친 그 쯤에 있는 등불이다. 어머니의 등불은 그렇게 자식을 기다리는 장님 같은 기인 긴 기다림이었고 긴 긴 세월이었다. 거기에서 언제나 어머니는 길쌈을 하고 계셨고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 어머니는 가셨다. 무거운 인생의 머나먼 짐을 끌고와 지상에 다 내려놓고 내 가슴에 새 등불 하나 걸어두고 가셨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희로애락을 걸어두고 가신 어머니의 등불.

그 등불은 전등불이 아니라 가물거리며 기름 없이 타는 등잔불이다. 세찬 찬바람도 그 곳에서 잦아들고 종일 눈발도 그 곳에서 잦아드는 아늑한 가슴 한 켠에서 타고 있는 등잔불이다.

그 등잔불이 지금도 내 가슴에서 지지지 지지지 앓고 있는 것은 왜일까. 아버지의 그친 침묵을 남겨둔 등불이어서일까. 어머니의 그친 설움을 남겨둔 등불이어서일까.

내 가슴에다 걸어두고 가신 어머니의 등불은 이제는 아내의 등불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다리듯 술에 취해 늦게 돌아오는 나를 처마 끝에서 기다리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마중 나가듯 가로등 길가로 마중나가는 내 아내의 등불. 내 아내도 어느덧 내 어머니의 등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등불은 어머니의 등불보다 가깝고 바람 소리도 가깝고 물소리도 가까운, 어머니의 등불보다 밝은 주택가나 아파트 골목 같은 데에 있다.

아내의 등불은 강 건너 통통배를 타고 몇 시간을 가야 만날 수 있는 등불이 아니다. 승용차를 타고 몇 십분 정도 가면 만날 수 있는 등불이다. 거기에서 TV 연속극을 보거나 반찬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거나 하는 등불이다.

어머니의 등불은 희미한 등잔불이나 아내의 등불은 환한 전등불이다. 아내의 등불은 언제나 밝고 환해서 밖에서 일하고 있는 나의 머언 그림자까지 비출 수 있고 나의 생각과 행위를 감시할 수 있다. 나의 지친 침묵을 지켜주는 등불이어서일까. 아내의 지친 설움을 태우고 있는 등불이어서일까.


어머니의 등잔불과 아내의 전등불.

어머니의 등잔불은 희미해도 내 영혼의 그림자까지 비출 수 있고 아내의 전등불은 밝아서 내 영혼의 껍데기까지 환히 비출 수 있다. 이 두 등불이 일생 가슴을 비추고 가슴에서 타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내 후회의 생각과 잘못한 행위들을 아무 이유 없이 받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등불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깜빡이는 등불. 그것은 나에게는 더 없는 하늘의 따뜻한 햇볕이요 더 없는 대지의 촉촉한 봄비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는 내가 존재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 이유이다. 두 등불이 없었다면 두 발로 세상을 어찌 걸어다닐 수 있으며 두 눈을 뜨고 세상을 어찌 다닐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은 대물림 한다는데 내 딸들 가슴에도 내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불을 걸어두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어머니는 희미한 등잔불이었지만 딸들에게는 내 아내의 환한 전등불일 것이다. 명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사랑의 차이야 어디 있으랴. 아마도 내 어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등불처럼 내 아내도 딸들에게 그 등불을 물려주었을 것이다.

등불은 나에게 아늑함이었고 꿈이었고 용기였고 실현이었다. 그리고 내 삶의 존재 이유였다.  


강가에
혼자
왔다간
달빛일지 몰라

누구의
울음
남겨둔
등불일지 몰라

늦가을
그대 기슭에서
한 잔하는
이 가을비

- 내 사랑은 19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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