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사랑’ 후기
‘혼자만의 사랑’ 후기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0.08.09 11:30
  • 호수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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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웅 순 칼럼위원

▲ 신 웅 순 칼럼위원

홈에 내렸다. 개찰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3, 4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그 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몰라본다면 어떡할까. 많이 늙었으면 또 어떡하고. 그래도 꼬옥 안아 주어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대학교 교육 실습 때 만났던 여학생. 짝사랑했던 그 애틋했던 여학생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아, 안아주기는 커녕 그만 어정쩡한 모습으로 손만 잡고 말았으니. 35년 만의 해후치고는 영화의 클라이막스 명장면은 너무나 싱거운 연출로 끝나고 말았다.

커피숍으로 갔다.
저녁 햇살 몇 개가 주름살을 스쳐갔을 뿐 그녀의 얼굴은 단정한 옛날 그대로였다. 나는 에세이집 <못 부친 엽서 한 장>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이 무엇이에요?”
“107쪽 「혼자만의 사랑」을 읽어보면 알아요.”
“집에서 읽어볼께요.”
“아뇨. 지금 읽어보아야 해요.”

그녀는 조용히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 내 마음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삼십년을 달려온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읽어가는 그녀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에세이집에 ‘혼자서 사랑했던 〇〇〇 에게 35년만의 조우. 저자가’ 이렇게 싸인을 했다. 거기에는 그녀에 대한 지난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농축되어 있었다. 참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 때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까였다. 이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산 넘고 강을 건너 세월까지 건너온 것이다.

나이 먹은 소년이 지금 나이 먹은 소녀 앞에 죄인처럼 앉아있는 것이다.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답은 없었다.

사랑한다는 소리 한 마디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런데 가족 얘기며, 남편 얘기며, 자식 얘기며 등등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이런 행복을 주어 정말 고맙다는 침착한 말까지 덧붙였다. 이 얘기를 듣기 위해 불원 천리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적막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탄 열차는 다시 먼 세월 속을 달립니다.’

기약 없는 메시지였다. 이렇게 해서 혼자만의 사랑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35년 동안 가슴 속에 있었던 그녀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단 한 번의 만남이 되고 말았다.

누가 그랬다던가. 첫사랑이나 짝사랑했던 여인은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그래야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늘 그리워할 수 있다고. 내 가슴 한 켠에 있었던 그녀는 이제는 내 가슴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았다.  

그녀는 못 부친 엽서 한 장인 줄 알았다. 그녀는 머언 세월, 머언 기슭에다 놓고 간, 못 부친 엽서 한 장인 줄 알았다. 그녀는 봄비가 내리면 시가 되는 가슴 한 켠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정말 그게 아니었다.
‘나도 사랑했었어요’ 라고 내게 한 마디라도 해주었더라면 어찌할 뻔했었을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35년 간 나의 긴 긴 강물은 헛되이 흘러가지 않았으리. 무엇을 더 바랴랴. 그저 그 뿐으로 족했을 것을.

그녀는 단 한 번 마른 땅을 적시고 간 한여름 소나기였고, 단 한 번 마른 하늘을 때리고 간 한여름 천둥, 번개였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를 적시고 간 가슴은 말라버렸고, 내 가슴을 치고 떠난 하늘은 까마득히 사라지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짝사랑은 이렇게 금세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 머물고 있는 것들이다. 새삼 내 아내의 사랑이 성큼 다가오는 것은 어인 일일까. 찰나와 영원의 차이는 간발의 차이이다. 가까운 것과 먼 것도, 망각과 그리움도, 미움과 사랑도 다 백지장 한 장 차이이다. 
무지개는 멀리 있어 아름다운 것이다.

* 시조시인 ‧ 평론가, 중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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