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서천의 강마을 갯마을 - (10)신성리
■ 기획취재/서천의 강마을 갯마을 - (10)신성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3.08.31 12:53
  • 호수 6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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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서 서울 올라가는 지름길이었다”
하굿둑 개설로 뱃길도 사라지고 물고기도 사라지고
▲ 신성리 항공사진

세우도화랑(細雨桃花浪 : 보슬비에 복사꽃 물결치고) / 청상로엽추(淸霜蘆葉秋 : 맑은 서리에 갈대잎 나부끼는 가을이라) / 귀범하처락(歸帆何處落 : 돌아가는 돛대는 어느 곳으로 떨어지는지) / 묘묘일편주(渺渺一片舟 : 아득히 조각배 한 척 떠간다.

고려말 목은 이색 선생이 지은 ‘한산팔영(韓山八詠)’ 시 가운데 여섯 번째인 ‘진포귀범(鎭浦歸帆. 진포로 돌아가는 배)’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기도 한 박수환 한산면장은 “이 시에 나오는 배는 웅포 쪽에서 낚시를 하고 돌아오는 배로 진포는 곧 신성리 포구”라고 말한다.
한산면사무소앞 4거리에서 남쪽으로 난 613번 지방도를 따라 연봉리를 거쳐 금강변에 이르면 신성리 갈대밭이 나타난다. 이곳에 신성리가 자리잡고 있다.


▲ 신성리 포구 자리에 띄워놓은 유람선
한산면 신성리에는 익산시 웅포를 잇는 포구가 있었다. 웅포에서 신성리 포구로 건너와서 한산-마산-홍산-외산-청양-유구를 거쳐 천안까지 이어지는 옛길은 거쳐 전라도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갈 때 이용하는 지름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동학농민군도 북상을 했으며, 고려말 왜구가 쳐들어와 이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홍산으로 진출했다. 부여 홍산에는 최영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홍산대첩비’가 있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신성리는 백제 때 마산현에 속했으며, 신라시대 가림군의 영현인 마산현 소속이었고 고려 때에는 임천에 속한 한산현 소속이었다. 1413년 조선 초기에 한산군이었다가 조선 말 한산군 동상면 지역으로 금강에 새로 나루터를 만들고 이어서 마을이 들어섰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용두리 일부와 임천군 홍산면의 포촌리, 교항리, 고읍리 일부를 합해 신성리(新成里)라고 했다.

▲ 신성리 갈대밭. 예전의 1/3로 줄어든 모습이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길목이었던 신성리는 포구를 중심으로 제법 번성했던 곳이었다. 갈대밭 뒤로 논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고 금강변의 갈대를 이용하여 소득을 올렸으며 또한 풍부한 수산자원을 바탕으로 어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갈대에서 나오는 소출이 논보다 많았다고 올해 89세이신 마을 어르신은 증언하고 있다. 70대 주민 가운데에는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 주민들의 주된 교통수단은 배였다. 강경에서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3척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했다. 호남선이 개통된 뒤로는 익산시 함열로 가서 기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웅포에서 함열까지는 직선거리로 6km이다.


1991년 금강하굿둑이 생긴 이후 이러한 생활 모습은 사라졌다. 드나들던 바닷물과 함께 뱃길도 사라지고 물고기도 사라지고 문화까지 통째로 뒤바꾸어 놓았다.
주민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가 살기 좋았다”고 말하면서도 벼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그들은 금강하굿둑 해수유통에 반대 입장이다. 농업용수 공급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는 서천군의 방침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 주민 증언

갈대밭 소출이 논보다 많았다

지난 26일 뉴스서천 기획취재팀은 신성리 마을을 찾아 마을 이장 서동선씨와 주민들로부터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이를 정리한 것이다.

옛날에는 여기가 여기가 큰 포구였다. 처음에는 충청도하고 전라도하고 공동으로 관장을 했었다. 여름에는 보리 한말, 가을에 쌀 한말씩 내서 운영을 했는데 나중에는 전라도에서 다 가져갔다.
옛날에 버스 안다닐 때 다 배로 다녔다. 웅포에 배가 많이 들어갔었다. 큰 중선배도 올라왔다. 강경환이라고 기곗배가 군산으로 다녔다. 시음리에 배가 다녔다.

옛날에는 여기가 여기가 큰 포구였다. 처음에는 충청도하고 전라도하고 공동으로 관장을 했었다. 여름에는 보리 한말, 가을에 쌀 한말씩 내서 운영을 했는데 나중에는 전라도에서 다 가져갔다.옛날에 버스 안다닐 때 다 배로 다녔다. 웅포에 배가 많이 들어갔었다. 큰 중선배도 올라왔다. 강경환이라고 기곗배가 군산으로 다녔다. 시음리에 배가 다녔다.


전라도에서 태모시가 많이 건너오고 필모시 짠 놈은 전라도로 넘어갔다. 전라도로 못 건너가게 하느라고 막기도 하고 그랬다. 이 포구에서 웅포로 건너가 함열로 기차를 타러 댕겼다. 웅포에서 산 하나 넘어가면 함열이다.
지금은 19가호밖에 안되지만 옛날에는 50호 넘게 살았다. 셋방살이도 하고 그랬다. 여그 부자들이 살었는디 배가 끊기면 못 건너간 사람들 오라고 해서 멕여주고 재워주고 그랬다. 옛날에 여그 주막집이 두서너 개 있었다.

여기서 한산가는 도로가 옛날부터 국도이다. 일본 12대도 이리 지나갔다. 왜정 때 체신부에서 독을 깎아서 박어놨었다. 그래서 다리난다고 할 때에도 꼭 이리 날 줄 알었는데 부여로 낫다. 서천군이 사람이 없어서 부여한테 뺏긴 것 아닌가. 문화재 멋 때문에 그리 났다고도 허는디 거그는 밑땅에 단단허고 여그는 물러서 다리를 거그다 놨다는 얘기도 있다.


여기까지 조수가 올라왔다. 사리 때는 부여 넘어서까지 갔다. 배타고 논산까지 들어가봤다. 지류인 논산천 타고 더 올라갔다. 여그 사람들이 배를 타고 연평도까지 조기 잡으러 가고 그랬다. 지금 이 때가 한창 갈치 나올 때다. 우여 많이 나고 황새기, 복어, 뱅어, 새우 고기 좋은 거 많이 났었다. 재첩도 엄청 나왔다. 종어라는 물고기도 잡혔는데 맛이 가장 좋았다. 여기서는 ‘쫑어’라고 불렀는데 메기처럼 생겼다. 크기도 메기만 하고 색깔이 검은색이다.


여그 원산천 건너면 부여 시음리인디 거그 사람들 여기 없으면 다 굶어 죽는다. 그쪽은 논밭이 별로 없다. 다 여그 와서 농사짓고 산다. 한산면으로 편입시켜 달라고 하기도 했다. 학교도 한산으로 많이 댕겼다. 옛날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지금도 상권은 한산에 있다. 한산으로 많이 다닌다.
옛날에 동네 패싸움을 했었는데 그쪽이 동네는 컸지만 우리한테 졌다. 연사움은 그쪽이 잘한다. 근력으로는 이족이 이기는데 연싸움은 그쪽은 잘했다. 연싸움하면 쫓기다 쫓기다 금강까지 간다. 그러다 줄끼리 붙는다.


이 앞의 논이 다 갈대밭이었고 지금 갈대밭은 옛날 1/3도 안된다. 어마어마 했다. 갈대밭 끝에 가면 웅포가 바로 저만큼 있었다. 우리가 순천만 가봤지만 순천만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옛날에 갈자리 만들 때는 갈대밭이 논보다 소출이 더 나왔다. 지금은 갈대 아무 데도 소용없다. 갈꽃 뽑아서 빗자루 매고 갈자리 짜고… 여그 갈대밭에서 겨울 날 것이 나왔다. 갈대밭에 가면 갈게가 버글버글했다.


배고프면 갈 뿌리를 먹었다. 한짐 잘라서 지고 와서 먹었다. 갈대뿌리 엄청 많이 먹었다. 대나무처럼 생겼는데 연해서 칡뿌리 먹듯이, 단수수 먹듯이 씹으면 달작지근하다. 위장병에 그렇게 좋다고 헌다.
여기 제방은 87년 수해 나기 전에 쌓았다. 제방 때문에 물이 못나갔다. 수해 나고 나서 2m 더 올렸다. 집이 묻히는 한이 있어도 제방 못 끊는다고 했다.

이 갈바탕을 한 사람이 허가 내서 보상을 여러 번 받았다. 이 동네 사람은 혜택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딴 동네 사람이 장사허지 여기 사람은 쓰레기나 치우고 그런다.
그전에 JSA 영화 촬영 하기 전에는 동네가 조용하고 좋았는데 그 뒤로 관광지가 돼버렸다. 신성리 갈대밭 군에서 뺏어가 버렸다. 동네 사람 말은 들어도 안보고 멋대로 개발을 했다. 서천군 특산물만 팔게 하고 다른 사람은 장사를 못허게 한다. 독점판매를 한다.   

▲ 뉴스서천 취재팀에 마을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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