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면 이장단 뭉쳤다
“임시정부 4대의장 역임한 김인전 선생은 자랑스런 우리고장 인물”“그동안 훌륭한 김인전 선생을 알지 못한게 부끄럽고 이제라도 그분의 뜻을 기려 주민들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킬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난 8일 1876년 화양 와초리 출생인 독립운동가 김인전 추모비 추진위원회를 발족한 김명진위원장(62·추북리 이장·사진)은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그 분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회를 금치 못한다.
김인전 선생은 1923년 53세의 일기로 과로로 숨을 거둘 때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 4대의장으로 싸웠지만 역사의 뒤안길에 있다가 80년대 공식 유공자로 인정. 지난 93년 8월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등 4명의 다른 임정인사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또한 작년에 국가보훈처의 ‘5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인전 선생은 독립운동가 뿐 아니라 상해로 가기전 고향인 화양에서 주로 교육자와 목회자로 활동했다. 1909년 아버지가 설립한 사립기독교파 한영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1년 사재로 완포교회를 설립, 장로로 임직했다. 마산 새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송기면, 고시상, 김인두 등 많은 독립유공자들은 당시 선생의 제자인데 이는 선생이 뿌린 민족정기의 씨앗이 열매를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친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있던 김인전 선생은 34세라는 늦은 나이에 한영학교를 숙부에게 맡기고 평양신학교에 입학. 졸업후 전주서문안교회 목사로 부임해 활동하면서 전주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후 김인전 선생은 전주 만세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한 배후로 주목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 에베솔의 도움으로 상해에 망명. 임정에서 계파에 휩쓸리지 않고 짧은 기간에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김인전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최일뭉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노병회’를 꾸려 군인양성의 기초를 닦았다.
독립운동가 김인전 선생의 공로를 일전부터 알고있던 화양 와초리 임종덕(74)씨는 음지에서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으나 뜻을 전하지 못했다. 작년 마을 연말 총회때 안건을 제출 이장협의회가 뜻을 모아 민간차원인 이장단이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것.
추진위는 사업비로 1억원을 예상하는데 민간차원이라 자본확보가 어려워 주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 24일까지 청원문에 면민 도장을 받아 군과 도에 보낼 계획이다.
추모비 추진위는 “올해 광복 57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이 인류평등의 대의에 있음을 호소하였던 독립운동사와 일제에 항거해 주권회복을 위해 투쟁했던 김인전 선생의 추모비 건립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며 “그동안 김인전 선생을 잘 알지 못해 그분의 생가터는 없어졌지만 이번 추모비 건립을 계기로 다양한 선양사업도 함께 전개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한편 추모비는 김인전 선생이 교편을 잡았던 한영학교에 건립될 예정이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산 교육장으로 지역군민의 자긍심은 물론 지역공동체 형성과 문화창달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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