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훼손되면 군수도…
한번 훼손되면 군수도…
  • 뉴스서천
  • 승인 2003.10.31 00:00
  • 호수 1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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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 지역 사람들이 피해를 입자 정부에서는 읍성을 쌓도록하였다. 이에 우리 고장에서도 서천, 비인, 한산 읍성을 쌓았다. 서천 읍성은 세종 때 쌓았으며, 비인 읍성은 세종 때, 한산 읍성은 중종 때 축성되어 1914년까지 서천, 비인, 한산군의 행정적 군사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또라고 부르는 고을 원님이 근무하던 곳이다. 또 사또를 수령이라고 부르는데, 수령은 군수와 현령의 준말이다. 군수는 종4품이고 현령은 종5품이며 현감은 종 6품관이다. 사또가 근무하는 동헌이 있기에 읍성 안을 읍내라고 부른다. 서천 군사리는 문산, 시초, 장항, 마서, 서천 사람들이, 한산 지현리는 한산, 화양, 마산, 기산 사람들이, 비인 성내리는 비인, 판교, 서면 종천 사람들이 읍내라고 불렀다. 그 고을의 중심지으로 읍성이 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 후 1914년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을 합쳐서 서천군이라고 부르면서 한산과 비인이 면으로 축소되면서 서천을 읍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일제는 자기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던 읍성 안에 식민지 지배에 편리한 아니 길들여진 조선인을 육성하기 위하여 한산 읍성 안에는 한산보통학교를, 비인 읍성 안에는 비인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읍성은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성돌이 학교를 짓기 위한 공사 자재로 활용하자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제 자기들의 집을 짓는다든지 장독대나 뚝방을 쌓을 때마다 하나둘 성돌을 빼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 흔적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읍성은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해방되고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문화재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서천 읍성, 한산 읍성, 비인 읍성을 각각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로 1984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읍성들은 각종 개발과 우리들의 편리함을 위하여 온갖 수난을 당하고 있다. 당장 비인 읍성은 주택을 건설한다고 허가를 받은 우체국 뒤 선도리로 가는 입구 부분이 훼손되고 있다. 이곳은 읍성 바로 밑까지 터 파기를 함으로 붕괴의 우려성이 있다. 물론 자신들의 주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전 대책을 마련하겠지만 읍성에 대한 보호 의식은 엿볼 수 없다. 직접적으로 성벽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비인 읍성의 특징 중 하나인 해자를 훼손하였다. 해자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파 놓은 성 주변의 호이다. 평지성에는 이곳에 물이 흐르게 하여 적의 접근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해자가 터 파기로 인하여 그 구간이 모두 제거되었다. 또한 역사 유적에 대한 경관의 중요성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택 공사로 인하여 비인 읍성의 경관이 훼손됨으로 읍성이 자리한 입지를 파악할 수 없게 하였다.
또 한산 읍성의 경우도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일부 구간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반드시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면 읍성 통과를 지향하고 반대쪽 방향으로 피해서 한다면 좋으련만 굳이 읍성을 통과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반대편 사유지 보호가 우선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 정도이다. 조금 더 많은 보상을 하더라도 읍성을 보호하는 것이 당장은 정부가 어렵지만 후손들에게는 더 큰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한산 읍성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한산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서천 읍성은 이미 군사리 상수도 저장탱크를 만들면서 훼손이 심하게 되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훼손이 최소화되고 있어 다행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최근 성안에 위치한 서천 군청과 서천여자고등학교와 관련한 차량 출입이 빈번하여 성내가 번잡하게 되었다. 본래 서천 읍성 자체가 삼태기형으로 한번 들어가면 나오는 길이 외길이어서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 서쪽면으로 난 소로를 통하여 순환이 될 수 있도록 야금야금 도로를 확대 해 왔다. 지금은 승용차 한 대가 통행이 가능한 상태인데 민원이 있다하여 읍성의 적은 부분을 복토하여 양 방향 통행이 가능하도록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 훼손을 걱정하는 담당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결국 양방향으로 확장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서구화로 인하여 편리함만 추구하다 꼭 지켜야 할 것을 너무나 많이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군수는 잘 알고 있을텐데 어메니티를 외치면서 문화재를 훼손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후문에 의하면 그 정도의 훼손은 군수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궁금하다. 어떻게 4년 임기 군수가 600여년 간직한 문화재를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그 저의가 궁금하다. 훗날 그 편리함과 융통성으로 훼손된 서천읍성에 대한 원성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결국 서천읍성 뿐만이 아니라 한산 읍성, 비인 읍성의 작은 훼손은 군수가 임기 내 책임을 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 앞에 책임을 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메니티! 보호해야 할 것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천 읍성 훼손의 역사를 여기에 기록한다.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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