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세월호는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 모시장터 세월호는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 칼럼위원 정해용
  • 승인 2020.04.17 10:48
  • 호수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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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들은 대문에 기대어서 밤을 새우고/ 아버지들은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밤을 새운다./ 비록 저희 아들딸이 다 돌아왔다 한들 이 밤에/ 어느 어버이가 그 배갯머리를 적시지 않으랴.

1960년에 있었던 4.19민주혁명 직후 당대의 대표시인 조지훈 선생이 희생자들을 위해 지은 조시(弔詩). 권력 욕심에 눈먼 당시 자유당 정권은 3월에 있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미 18년이나 지속된 이승만의 독재 권력을 더 유지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민주질서를 유린하였다.

나이든 분들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실 것이다. 군수 경찰 학교교사 통반 조직 등 국가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종용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유권자들에게 돈을 뿌리고 술과 밥을 사고, 야당의 선거 운동원들을 협박 폭행하고, 선거일에는 무더기표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등 민주선거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부정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억지 승리를 만들어냈다.

이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 4.19학생의거. 이승만 정권은 여기에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응답하였고, 그에 분노하여 시위가 범시민적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경찰을 동원해 실탄사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한 위협사격이 아니었다. 경무대로 향하는 광화문 길목에서 경찰의 실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186, 다친 사람은 6천명을 넘었다. 이 가운데는 젊고 어린 대학생 22, 고등학생 36, 초중학생 19명도 포함되어 있다(이근호,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청아출판사).

결국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며 시민혁명은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이 사태로 자식을 잃은 어버이들의 고통은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은 자식을 잃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저희 아들딸이 다 돌아왔다 한들자식을 둔 모든 어버이의 마음이 한결같이 비통하였음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남의 아픔에도 공명하는 측은지심은 인간의 조건에 해당하는 본성이다.

또 한 번의 잔인한 4월이 우리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2014416, 진도 앞바다에서 낡은 여객선 세월호304명의 귀중한 목숨과 함께 침몰하였다. 10대의 단원고교 학생 250명이 포함되어 있다.

 

누구든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달려가 구하려 하지 않느냐. 인간에게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볼 때)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

 

맹자의 말에 비추어보면, 당시의 권력은 비인간적 권력이었다. 많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시간과 장비와 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를 포기하고 바라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 비인간적 권력은 양심에 가책을 느낀 다수 시민의 힘에 의해 붕괴되었다.

사람은 같은 사건을 놓고도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한다. 인간다운 인간, 사단칠정의 정상적 정서를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충격과 슬픔과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사건으로 기억되어 있다. 이제는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하여 진정한 애도를 고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지 흥밋거리로 기억되고, ‘시체팔이로 기억되고, 정치적 반란이나 보상금으로 기억되고, 심지어 변태적 불륜사건으로도 기억이 되는 모양이다.

같은 사건에서 어떤 면을 기억하는가에는 그 사람의 사상과 인격과 정신상태가 총체적인 작용을 한다. 세월호에서 비통함이나 수치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모독할 수 있는 가장 저질스런 막말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국가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에 출마자들 사이에도 있었다. 이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한국사회의 사이코패스적 병폐가 고쳐지기까지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시인,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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