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40) / 황혼연설(黃昏演說)
■ 박일환의 낱말여행 (40) / 황혼연설(黃昏演說)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4.06 09:44
  • 호수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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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의 잔소리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나이 든 사람을 흔히 꼰대라는 비칭으로 부른다. ‘꼰대질혹은 꼰대스럽다라고 하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가리킨다. 요즘 이 말이 자주 쓰이는 건 기성세대가 내보이는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일 터다. 기성세대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한다고 여기지만 젊은 세대가 듣기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일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나이 들수록 말은 줄이고 대신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말이 일종의 격언처럼 통용된다.

나이 든 사람들의 잔소리를 뜻하는 말이 국어사전 안에 있다.

황혼연설(黃昏演說): 노인의 잔소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

황혼은 본래 해가 질 무렵을 뜻하는 말이지만 노년을 비유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황혼연설을 연결해 놓으니 왠지 어색하게 다가온다. 평소 들어보지 못한 말이거니와 예전에라도 저런 말을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국어사전에 실린 말 중에서 낯설게 여겨지는 것들 상당수가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쓰는 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어사전에는 그런 말이 없고, 일본어 사이트에 들어가 봐도 황혼연설이라고 된 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어 쓰던 말이 틀림없는데, 언제 누가 저런 말을 사용했을까? 다시 한 번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옛 신문 기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게 아래 기사였다.

주름살 진 할아버지는 인생계급장을 붙인 장군으로 대접한다. 그러나 인생계급장()들의 말씀은 도시 인기가 없다. 노인의 잔소리를 황혼연설(黃昏演說)이라고 하니 말이다.(경향신문, 1962.7.16.)

그 당시 젊은이들의 속어를 다룬 기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기사 안에서 꽤 많은 낱말을 소개하고 있는데, 육체파를 숫자를 활용해 ‘678’로 표현한다든지 아무렇게나 생긴 얼굴을 무허가건축으로 지칭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영어를 동원해서 방귀를 룸 나인(room-nine=房九)’으로 비틀어 표현했다는 내용을 보는 순간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속어나 유행어는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웬만큼 시간이 흐르면 슬그머니 사라지곤 한다. 다른 기사들을 통해 황혼연설이라는 말이 1990년대까지만 해도 더러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그런 걸 용케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자가 찾아내서 표제어로 등재했으니, 태어난 값은 충분히 한 셈이라고나 할까?

연설을 하는 사람은 진지할지 몰라도 듣고 있는 사람은 대체로 지겨운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법이다. 운동장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애국조회를 하던 시절에 교장 선생님들의 훈화 시간은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했던가. 황혼연설이라는 말을 만들어 퍼뜨린 사람은 교장 선생님들의 훈화 시간에서 착상을 얻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학생 시절에는 교실이며 복도마다 정숙이라는 말을 써붙여 놓았고, 어른들의 말에 한마디만 뭐라 해도 말대꾸한다며 야단맞았단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마음 놓고 말 좀 하려니 다시 또 입을 다물라고 하는 세태가 서운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쩌랴. 시대가 그렇게 흘러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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